[역사소설]고주몽 32

등록 2003.03.09 17:43수정 2003.03.09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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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었소......."

연타발은 창백한 얼굴로 주몽을 맞았다. 주몽은 연타발의 상태부터 물었다.


"난 이제 틀렸소. 그건 내가 잘 아는 바요."

"무슨 얘기입니까! 이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연타발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한참동안 마른기침을 내뱉은 후 월군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하는 얘기지만 주몽공자께서 내 딸아이와 혼인해 소노부와 졸본천의 촌락들을 다스려 주시오."

주몽은 순간 동부여에 두고 온 예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졸본천의 수장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너무나 빨리 그 기회가 다가왔다는 두려움과 예주를 잊을 수 없었기에 주몽은 인사치레가 아닌 즉각적으로 거부의 뜻을 밝혔다.


"그러면 이 늙은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소! 이미 주몽공자께서 혼인을 한 몸임을 알고있지만 이 늙은이, 염치없이 간곡히 부탁드리오. 딸아이와 혼인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곳의 주인이 되기 위해 오랜 날을 보내야 할 것이오. 이는 우리로서도 해가 되는 일이니 부디 청을 들어주시오!"

주몽은 말없이 연타발의 앞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월군녀가 주몽의 발 앞에 엎드리며 다시 부탁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버지의 말이 옳습니다."

주몽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엎드린 월군녀를 잡아 일으키고선 돌아가 재사, 오이, 묵거를 불렀다.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실로 난감합니다."

재사, 오이, 묵거는 실로 좋은 기회라고 여겼지만 주몽의 속을 짐작하고 있기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후 묵거가 입을 열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것입니다. 저희들은 주몽공자께서 그 제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졸본천의 왕을 칭하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왕을 칭하라는 소리에 주몽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묵거의 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단 소노부장의 따님과 혼인을 하신 후 왕을 칭하면서 동부여에 계신 부인께 왕비의 칭호를 내리십시오. 그리고 혼인한 소노부장의 따님에게는 왕비의 대우를 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렇게 하면 용납되지 않을 거요."

주몽이 펄쩍 뛰었지만 묵거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용납이 되지 않을 뿐입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런 일 따윈 곧 잊어버립니다."

묵거의 말에 힘입은 재사와 오이도 주몽을 설득했다. 그들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일념에 강하게 사로잡혀 버렸다.

주몽은 이 순간 인간 주몽이 아닌 자신이 그토록 꿈꾸어 오던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키는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은 고뇌하지 않고 단지 행동할 뿐이다.

"그 뜻에 따르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급히 달려와 연타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주몽이 사람들과 급히 달려갔을 때는 각 촌락의 대표들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연타발은 무대와 배우들을 모두 갖추어 놓은 뒤 주인공을 부른 셈이었다. 연타발은 느리지만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갈족을 순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무찌른 주몽공자야 말로 앞으로 내 딸과 함께 졸본천을 이끌 훌륭한 재목입니다. 행여 반대의사가 있다면 여기서 기탄 없이 얘기해 주시오."

아무도 반대의사를 말하지 않았다. 반대에도 무릅쓰고 계로부가 거의 단독으로 말갈족을 무찔렀다는 것에 기가 죽은 데다가 그동안 오랜 신망을 얻어왔던 연타발의 마지막 유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뒤를 부탁하오."

연타발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사람들의 오열이 막 태어난 아기 울음소리로 느껴지면서 주몽은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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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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