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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앞부분을 채우는 '정복당한 자의 진술'은 군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원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뭐, 남의 나라 전쟁 이야기라 특별한 관심이 없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전술의 실패입니다.
프랑스는 전차와 비행기를 이용한 전격전, 속도전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방어선을 치고 버티는 옛날 전술을 고집했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식민지사에서 익숙한 투창 대 총의 전쟁을 다시 한번 벌인 것이고 이번에는 우리가 원시인 역할을 했다" (46쪽).
다음 내용인 '한 프랑스인의 자성'은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블로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지도자와 아마 우리 지도계급에게도 조국의 위기 앞에서 가차없는 영웅주의가 부족했다"(146쪽). 이라크와 한반도에 위기가 감돌면서 한국에서도 애국자들이 여기저기 출현하고 있습니다. 한 교수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자기 충성심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정말 애국자일까요? 블로크는 이렇게 답합니다.
"소위 '우파'라는 정당들이 오늘 패전 앞에서 그렇게 쉽게 포기한 사실에 역사가는 그리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왕정복고로부터 베르사유 의회까지 우리 역사의 거의 전 과정에서 그것이 그들의 변함없는 전통이었다"(161쪽). 그들의 충성은 공화국에 대한 애국심이 아니라 자기 이익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 | 글쓴이 소개 | | | | 글쓴이: 마르크 블로크 (Mark Bloch)/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육받고 가르치면서 라이프치히와 베를린 대학에서 당시 독일학파의 방법론과 연구업적을 접할 수 있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보병 상사로 복무하면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십자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9년 동료인 뤼시앵 페브르와 『경제사회사 연보』를 창간했고 1936년에는 소르본 대학의 경제사 전임강사로 임명되었다. 1939년 군으로 복귀해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한 뒤에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했고 1944년 붙잡혀 총살형을 당했다. 지은책에 <기적을 행하는 왕>,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 성격>, <봉건사회>, <역사를 위한 변명 또는 역사가라는 직업> 등이 있다.
옮긴이: 김용자/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2년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책에 <서양현대사>(공저)가 있고, 옮긴책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이 있다. / 알라딘 | | | | | |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부분은 그가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며 썼던 글을 모은 '제3부 지하출판물'입니다. 여기서 그는 더욱더 강하게 기득권 세력을 비판합니다(홍세화 선생은 한국의 기득권 세력을 '사회귀족'이라 부릅니다).
"귀족의 애국심은 그들이 국가를 지배하는 동안, 민중을 국가에 복종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태도였음이 밝혀졌다. 1932년, 그들이 지배권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1936년, 그들의 두려움이 확인되면서 인민에 대항하여 외세에 호소하려는 본능을 다시 발휘했다. 그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 결핍은 나라 전체를 패배의 분위기로 몰아넣었고 결국 참패를 당하자 그들은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적의 보호 아래에서 적을 위하여 권력을 행사할 준비를 했다"(199쪽).
"인민에게 반드시 지배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이 지배자를 외국으로부터라도 받아들일 것이다. 국민주권, 즉 공화국이 없이는 국민의 자유도 없다"(200쪽). 블로크는 공화주의자입니다.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총살당한 그의 애국심은 국가나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대중을 향합니다.
또 블로크는 패전 후 프랑스에 세워진 비시 정부(Gouvernement de Vichy), 독일과 결탁한 지식인들을 비판합니다. 특히 독일이 전쟁에서 패할 기미가 보이자 자기 몸 챙기기에 급급한 지식인들을 비판합니다.
"'관용'이라는 말이 한마디로 그런 태도를 요약하고 있다. 먼저 국내에서의 관용이다. 진정한 죄인 또는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위해서, 좋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말 나쁜 사람을 위해서, 부당하게 박해를 받은 사람에게 광범위한 사면, 거대한 끄덕임을 하자는 것이다. 암시장 거래인들을 위해서(재판관에게 효과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몽지 씨는 우선 송사리에 관심을 두는 척한다. 그러면 거물은 나머지와 함께 넘어갈 것이다)"(215∼216쪽).
블로크는 몽지라는 지식인을 비판하며 관용 이전에 심판의 날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프랑스의 전범재판은 블로크같은 지식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어디에 숨어서 무엇을 했던 걸까요? 진보와 개혁을 떠드는 사람 중에도 이런 '부끄러운 지식인'이 숨어 있습니다.
블로크의 또 다른 관심은 올바른 교육제도에 관한 것입니다. 리보라는 지식인은 교육의 대중화를 우려하며 교육이 순종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철학교수들의 역할은 더 이상 학생들로 하여금 사상이나 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원칙들을 단단히 심어주어서 현존 질서를 존중하고 복종하도록 격려하는 것"(220쪽)이라 믿습니다. 그런 교육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듯이 죽은 학문, '살인학문'을 만듭니다. 수학공식과 계산법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학살하는 방법, 사체를 태우는데 필요한 기름의 양에 관한 계산으로 변합니다.
블로크는 개혁의 어려움을 얘기합니다.
"그 일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고통이 없이는 안 될 것이다. 선생들에게 그들이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행해온 방법이 최상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 어른들에게 그들의 아이들이 그들 자신이 교육받은 것과 다른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 그랑제콜 출신들에게 추억과 우정을 나눈 특권적인 기관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분야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미래는 용감한 사람의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말자"(236쪽). 이제 우리도 교육개혁을 시작한 때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바꿔야 할까요? 가장 큰 전제는 이것입니다.
"전체 시민의 문화수준의 계속적인 발전뿐 아니라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내일의 프랑스는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훨씬 많은 지출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237쪽). 그리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이것입니다.
"중등교육과 대학, 그랑제콜은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 '시험공부'. 다시 말해서 시험과 등수에 연연하는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단순히 교육의 가치를 검증해보는 시금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이후로는 모든 교육이 그쪽으로 지향하고 있다.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시험제도가 그것을 잘 습득했는가를 평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시험을 준비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서커스에서 재주를 부리는 개는 많은 것을 아는 개가 아니라 미리 선택된 연습을 통해서 알고 있는 듯한 환상을 주도록 훈련된 개다"(239쪽).
"우리는 매우 개방적인 중등교육을 원한다. 그것의 역할은 출신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계급에 근거한 교육이기를 그치거나 다시 그렇게 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므로 선별은 불가피할 것이다. 입학시험은 아마 계속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어린이에게 적절해야 할 것이다. 지식을 시험하기보다는 지능을 테스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매해 할 필요는 없다. 한 어린이나 청소년을 그가 12개월 동안 한 일을 가지고 평가하려는 것은 성장 심리학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의 발전단계에서 이 몇 개월이 도대체 무엇인가!"(246∼247쪽).
이제 사회를 바꿀 때가 왔습니다. 특히 잘못된 교육을 바로 잡을 때입니다. 경쟁과 서열을 없애고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원칙'에 충실할 때입니다. 지식인들은 그 원칙을 세우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물론 몽지나 리보처럼 기회주의적이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식인들은 반성하고 적절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동참은 그 후에나 가능합니다. 블로크는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까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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