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81

미친 늙은이 (1)

등록 2003.03.21 13:30수정 2003.03.2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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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미친 늙은이


"네 이놈!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허억! 누, 누구세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감히 어디에서 도둑질을…?"
"헉! 도, 도둑질이라니요? 소생은 아무것도 훔친 것이 없어요."

"뭐라고? 이런 괘씸한 놈을 보았나? 그럼, 지금 네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냐? 그러고도 아무것도 안 훔쳤다고? 고얀 놈 같으니… 어서 내려놓지 못해?"
"예? 이, 이거요?"

"그래! 당장 내려놔라!"
"왜, 왜요? 이, 이건 주인이 없다고 하던데… 주인이세요?"

"이놈이? 보면 몰라? 당장 노를 내려 놔라!"
"허억! 아, 알았어요. 내, 내려놓을 게요. 캑캑! 이, 이것 좀…"

장일정은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쥔 노인의 엄청난 악력(握力)에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의복을 움켜쥐었는데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이 순간 앞에 앉아 있던 호옥접이 발딱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 할아버지! 가가(哥哥)는 정말 아무것도 훔친 게 없어요. 이 배는 주인이 없는 배라고 했단 말이에요."
"뭐라고? 어떤 놈이 감히…? 누구냐? 그런 말을 한 놈이 누구냐고? 이 배가 내 배라는 것을 모르는 놈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떤 놈이 감히 내 배를 주인 없는 배라고 했느냔 말이다."


노인은 귓구멍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로 화가 났는지 눈은 부릅뜨고 있었고, 숨까지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 순간 노인의 손아귀에 잡혀있던 장일정의 얼굴에는 고통이나 겁 대신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계획된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기에 짓는 웃음이었다.

동해에 있는 천뢰도로 가서 뇌정 속에 산다는 만년뇌혈곤을 잡아 북명신단을 완성시키기 위해선 사숙인 남의의 허락이 먼저 있어야 하였다. 하여 장일정과 호옥접은 조르고 또 졸랐다.

하지만 남의는 아직 어리다면 어린 둘만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음모와 귀계(鬼計)가 횡행하고 보보(步步)마다 살기 그득한 강호로 보낼 수 없다면서 완강하게 버텼다.

청산이 푸른 한 땔 나무 걱정은 없으며, 장부의 복수는 십 년을 기다렸다 갚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직 미완성인 침구술을 익히고 있노라면 강호를 돌아 다녀도 될 적당한 나이가 될 것이고 그때 가면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산골 생활에 진력이 난 둘은 더 이상 대흥안령산맥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하여 남의가 귀찮을 정도로 조르고 또 졸랐다. 결국 남의는 두 손, 두 발 모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 교대로 밤이고 낮이고 아무 때나 졸라댔기에 잠 잘 시간도 부족하였으며, 심지어는 용변 볼 시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바라던 대로 동해를 향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가는 동안 호옥접으로부터 침구술을 확실히 배우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자로서 사부의 원수를 갚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렵게 익힌 의술이 자신의 대에서 실전(失傳)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흥안령산맥에서 천뢰도가 있는 동해까지 가는 길은 결코 가까운 여정(旅程)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신이 난 둘에 의하여 삽시간에 모든 행장이 꾸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남의는 나직이 혀를 찼다.

늙은 자신만 남겨놓고 떠나면서 남아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식량을 몽땅 쌌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산골 생활이 지루했으면 저럴까 싶어 측은하다는 표정도 지었다.

얼마 후, 일장 훈시를 들은 둘은 비호를 타고 강호행을 시작하였다.

장일정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이 사는 시진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것은 월하빙녀 호옥접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난 직후 조부의 품에 안겨 대흥안령산맥의 자락 속으로 스며들었기에 그녀 역시 중원행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둘은 가는 곳마다 입을 있는 대로 벌리면서 연신 감탄사를 토했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 너무도 즐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둘의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둘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대흥안령산맥을 내려올 때 둘은 희귀한 약초도 잔뜩 지고 내려왔다. 천뢰도까지 갈 여비가 턱없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그것은 적지 않은 은자로 환전되었다. 그 정도면 천뢰도까지 충분히 갔다 올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그러나 그 은자는 얼마 가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구입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먹느라 몽땅 소진된 것이 아니다. 짜고 치는 야바위판에서 몽땅 털린 것이다.

바람잡이들을 포함한 야바위꾼들의 속임수에 지니고 있던 은자를 몽땅 털린 이후 내리 사흘을 굶어야 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비호를 팔 수는 없었다. 장일정에게 있어 비호는 단순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호는 힘이 들 때면 자신의 투덜거림을 들어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리고 문득 문득 부친과의 단란했던 한 때를 떠올리게 하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비호를 팔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족히 사천 냥은 나간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겨우 은자 이백 냥에 사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시(馬市)에서 말을 거래하는 거간꾼들이었다. 따라서 비호가 어떤 말인지 알면서도 그런 것이다. 그야말로 눈감으면 코를 베어갈 세상이었다.

아무튼 사흘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어느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사흘을 쫄쫄이 굶은 것이다.

은자가 없기에 객잔에 들 수 없던 둘은 노숙(露宿)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 밤이면 제법 추웠기에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굴뚝 옆에 붙어 앉아 오돌오돌 떨면서 밤을 지새워야 하였다.

이때가 가장 심각한 고비였다. 여비가 한푼도 없기에 아직도 수천 리나 남아 있는 천뢰도로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남의에게 돌아가려고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온 길 또한 만만치 않게 먼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냥 돌아가려 해도 가는 도중에 아사(餓死)할 판이었다. 하여 이판사판이 된 둘은 무슨 수가 나겠지 싶은 생각에 계속해서 전진했다.

황도에 도착한 것은 대흥안령산맥을 떠난지 한 달이 훨씬 넘은 어느 날이었다. 전 같으면 고대광실이 즐비한 황도의 화려함에 감탄사를 연발하느라 바빴겠지만 굶주림과 피곤함에 지친 둘은 맥이 빠져 축 늘어진 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외마디에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는 제법 규모가 있어 보이는 장원에서 났다.

단말마 비명에 가까운 그것은 비단 폭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웠다. 잠시 후 장원에서는 난리 법석이 벌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로 미루어 누군가 위급지경에 처한 듯하였다.

초상이 나면 지나가던 거렁뱅이도 불러 배불리 먹인다. 그들이 사자(死者) 밥을 먹어주면 극락왕생(極樂往生)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 초상이 나면 누구나 얻어먹을 수 있다.

그렇기에 혹시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 장원을 기웃거리던 장일정과 호옥접은 황급히 튀어나오는 초로(初老)의 인물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하인인 듯한 그는 무슨 일이 났느냐고 물었으나 한시바삐 의원을 불러와야 한다며 튀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안에서는 여인들의 통곡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장일정은 장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에는 결코 적지 않은 여러 개의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여러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왜 들어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른 급한 일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 장일정과 호옥접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제야 왜 난리가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를 이어야 할 칠대독자가 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곱 살쯤 된 소년이 마당에서 놀고 있던 중 어디선가 나타난 독사에 물렸던 것이다. 하여 소년의 발목은 시퍼런 빛을 띄며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소년의 곁에는 모친인 듯한 여인이 연신 소리치고 있었고, 부친인 듯한 장년인은 조급한 듯 두 손을 비비며 서성이고 있었다. 아마도 의원을 부르러 간 하인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장일정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보아하니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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