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83

미친 늙은이 (3)

등록 2003.03.23 13:20수정 2003.03.2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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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죽음에 엎어져 흐느끼던 여인은 가까이 다가선 장년인의 의복을 부여잡으며 오열하였다.

"……!"


장년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한가롭게 침상에 기대어 있다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독사를 보았었다. 집 안에 뱀이 있으면 좋지 않기에 잡아야한다 생각했지만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놔둔 바 있었다.

그 결과 천금같은 아들이 죽었다. 그렇기에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자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보, 어떻게 좀 해봐요? 흐흑! 우리, 우리 명아 좀 살려내 보란 말이에요. 아버님! 우리 명아 좀 살려 주세요. 예?"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장년인의 대답이 없자 여인은 가까이 다가선 노인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으으음!"


노인 역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노인은 점찍어 두었던 동기(童妓)의 머리를 얹어 주기 위하여 기원을 찾았다가 개망신을 당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내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독사를 고아 먹으면 정력이 절륜해진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는 그는 하인으로 하여금 은밀히 독사들을 잡아오도록 한 바 있었다. 하여 이십여 마리나 되는 독사들을 잡아 왔었다.


사내로서의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이 소문날 것이 두려웠던 노인은 손수 독사들을 탕기에 담던 중 한 마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독사는 순식간에 마루 바닥에 있는 좁은 구멍으로 사라져 버렸다. 비록 한 마리를 놓쳤지만 여전히 이십여 마리에 달하는 독사가 있기에 노인은 별 생각 없이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그 독사가 금쪽같은 손자를 물어 죽였으니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기에 낮은 침음성만 토할 수 있을 뿐이었다.

"흐흐흑! 아버님! 우리 명아 좀 살려 주세요. 예? 흐흐흑! 여보, 뭐해요? 어서 우리 명아 좀 살려봐요? 흐흑! 흐흐흐흑!"

남편과 시아버지의 소매를 번갈아 부여잡으며 오열하는 여인의 봉목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필설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런 여인의 모습을 본 시비나 하인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인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동안 낮은 침음성만 토할 수 있던 부자의 눈에는 자책의 빛이 그득하였다.

그러는 사이 장일정은 소년의 맥을 짚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독사의 독이 골수까지 미쳤다고는 하지만 생사잠의 위력이라면 적어도 일 각 이내에 해독될 것이다.

사실 침을 놓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독에 중독된 것이기 때문이다. 침을 놓은 것은 생사잠의 효능이 보다 빨리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놓은 것이다.

장일정이 맥문을 짚고 있는 이유는 반드시 소생하는데 그 시기가 언제일지를 알고자해서이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명아라 불린 소년의 안색은 점차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일정 뿐이었다. 모친은 여전히 엎어진 채 오열하고 있었고, 장년인과 노인은 차마 자식의 주검을 볼 수 없는지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엎어져 있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미약하기는 하였으나 분명 자식의 신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으으으으…!"
"허억! 며, 명아야! 명아야!"

"으으으으응! 으으으으응!"
"며, 명아야! 애, 명아야! 정신 좀 차려봐! 응? 명아야!"

"저어, 지금 그렇게 흔드시면 정신을 되찾는데 지장이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뭐, 뭐라고?"

"지금은 골수까지 치민 독이 해독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흔드시면 아드님께서 회복하는데 지장이…"
"아, 알았어요!"

장일정의 말에 여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 순간 장년인과 노인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퍼렇다 못해 시커멓게 보이던 소년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퉁퉁 부어 올라 이목구비를 분간할 수 없었던 조금 전과 달리 멀쩡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분명 하늘도 놀랄 기적이었다! 아직 어린 소년이 황도 최고의 의원도 포기한 환자를 살려낸 것이다. 게다가 그 환자는 죽은 시체였다.

북의와 남의가 홀연히 사라진 이후 강호에는 명의(名醫)다운 명의가 없다는 개탄의 소리가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개탄이 사라진 곳은 바로 황도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장일정이었다.

그는 독사에 물려 죽었던 소년을 살려낸 공로로 소화타(小華陀)라는 외호를 얻었다. 그는 전직 어의조차 살릴 수 없다던 환자를 살려냈기에 단숨에 천하제일의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것에는 소년의 부친과 조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들이 바로 황도를 총괄하는 무천장의 장주 부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워낙 구경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이백여 명에 달하는 구경꾼들이 있던 자리였기에 만천하로 소문이 번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열흘도 채 되지 않았다.

덕분에 황도를 떠나 천뢰도로 향하는데 필요한 여비가 부족하여 노숙하거나 굶은 적은 없었다. 어디를 가든 소화타가 나타났다며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소화타는 소문대로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 명의였다. 그런 그의 곁에는 진료를 돕는 천강선녀(天降仙女) 호옥접이 있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는 외호를 얻은 것이다.

그녀와 장일정의 손에 의하여 고질로 수십 년을 고생하던 환자들은 껄껄대며 웃게 되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서 뛰어갔고, 소경은 지팡이를 내던지고 거리를 질주하였다.

덕분에 천뢰도로 향하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시간만 잃은 것은 아니었다. 임상(臨床) 경험이 늘수록 의술은 경지를 달리하게 되었고, 천하 만민들의 진심 어린 흠모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결 같이 존대를 하게 되었다.

그런 장일정과 호옥접이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중원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상해(上海)였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숭명도(崇明島)를 지나 동쪽으로 오십여 리를 가면 천뢰도가 나온다.

상해에 당도하기 삼십 리 전에 위치한 자그마한 촌락에 당도하였을 때 장일정과 호옥접은 상해 최고의 객잔으로 불리는 영화객잔의 장방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의 자식에게 오랜 고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고질은 불과 며칠만에 치료되었다. 하나뿐이던 아들이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자 장방의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천뢰도로 가는 배에 태워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방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배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뢰도 주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와류가 즐비한 곳이다. 자칫 와류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제아무리 큰배라 할지라도 와류 속으로 빨려들게 되며 그렇게 되면 산산조각 나곤 하였다. 그렇기에 지금껏 수많은 뱃사람들이 그 구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설사 천뢰도에 당도한다 하더라도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언제 어디에서 벼락에 맞아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뢰도에서는 마른하늘일지라도 수시로 낙뢰가 떨어지곤 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수시로 떨어지는 낙뢰로 인하여 나무는 단 한 그루도 없다. 있다면 키 작은 관목들과 풀 포기 몇, 그리고 시커먼 바위들이 있을 뿐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곤 우글거리는 독사들뿐이다. 따라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무인도이다. 그러니 그곳으로 향하는 배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낙망한 장일정의 표정을 읽은 장방은 선원만 구할 수 있다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배를 구입해 주겠다고 하였다.

다시 희망이 생긴 장일정은 선원을 구하려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천뢰도로 가는 배에 승선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배에 타기만 하면 죽는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뇌정에 사는 만년뇌혈곤의 내단을 구하지 못하면 사부와 사숙의 원수를 갚을 수 없기에 장일정과 호옥접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던 중 천뢰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반색을 하던 둘의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상해에는 소문난 괴인이 하나 있었다. 반광노조(半狂老釣) 형운악(螢雲岳)이 그였다. 세수 일백에 가까운 그에게는 다 썩어가는 배 한 척이 있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벗해 살은 그에게는 신에 가까운 솜씨 둘이 있다.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낚시 솜씨였다. 다른 배들 모두 빈배로 돌아 올 때에도 그의 배는 늘 만선(滿船)이었다. 두 번째는 놀라운 조타술이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에도 그의 배는 바다를 향해 저어갔다. 그리고는 만선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조타술과 낚시법을 배우려고 몰려들었다. 그것 두 가지만 익히면 평생 굶어 죽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없었다. 반광노조의 괴팍한 성정 때문이었다.

평상시 반광노조는 법 없이도 살 정도로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누구든 허락 없이 자신의 배에 올라타거나 낚시대를 만지면 길길이 날 뛴다. 그럴 때보면 반쯤 미친 사람 같아서 반광노조라 불리는 것이다.

백 살이 가까운 나이였지만 오랜 뱃일로 완력만큼은 웬만한 청년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잘못 걸리면 뼈를 추려야 할 정도로 두들겨 맞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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