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도 미국이 정말 싫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62>푸름이의 생일잔치

등록 2003.03.24 15:57수정 2003.03.2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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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노오란 유채꽃밭에 선 푸름이(우)와 빛나

노오란 유채꽃밭에 선 푸름이(우)와 빛나 ⓒ 이종찬

"아빠! 애들이 한턱 단단히 쏘래"
"왜? 편집국장이 되었다고? 그럼 우리 아빠가 한턱 크게 쏜다고 그래"
"어떻게?"
"이리 와 봐! 그리고 잠시 고개 좀 숙여봐"
"???"
"아빠가 이렇게 한턱 크게 쏜다고 전해. 아나! 꿀밤 쏜다. 아나! 꿀밤 쏜다"

초등학교 최고 학년이 된 큰딸 푸름이는 개학하자마자 학교신문 편집국장에 선출되면서 몹시 바빠졌다. 일주일에 한번씩 학교신문도 내야 하고, 오 학년을 대상으로 새로운 수습기자도 뽑아야 한단다. 또 새롭게 한 반이 된 친구들도 사귀어야 하고, 오 학년 때 가까이 지냈던 친구들까지 만나느라 눈코뜰새가 없다고 한다.


학교신문 편집국장이 된 뒤부터 푸름이의 불평도 대단하다. 학교신문사가 있는 장소가 학교 방송실에 비해 몹시 좁다고 투덜대기도 하고, 신문사에 있는 컴퓨터가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고물이며, 난로까지 고장이 나서 추워서 못 있겠다는 둥 불평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건 신문담당 선생님한테 건의를 하면 되잖아"
"선생님께 건의를 해도 아마 교장 선생님께서 안 들어주실 걸"
"왜?"
"그러면 작년에는 신문을 어떻게 냈냐고 하실 걸"
"지레 짐작하지 말고 정식으로 글을 써서 건의를 한번 해 봐"

게다가 오 학년때 푸름이와 같이 수습기자 활동을 했던 아이들이 육 학년이 되어 정식 기자가 되면서 새로 편집국장으로 선출된 푸름이에게 거는 기대가 몹시 큰 모양이었다. 또 툭 하면 국장님, 국장님, 하면서 푸름이에게 한 턱 크게 쏘라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푸름이가 일 년 중 가장 대단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제 생일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해마다 푸름이는 제 생일이 다가오면 성탄절이나 되는 것처럼 일주일 전부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제 엄마 아빠는 당연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모자라 제 외삼촌과 이모, 외숙모들에게까지 다가오는 23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며 미리 생일 선포식(?)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 지난 해에도 푸름이는 제 생일 때 30여명에 가까운 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제 외할머니가 곤혹을 단단히 치르기도 했다. 그에 비해 빛나는 조용한 편이었다. 빛나는 생일을 맞이해도 아침에 생일밥을 먹고, 저녁에 제 엄마가 사다 주는 생일 케이크를 잘라 먹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빛나의 말마따나 봄방학 중에 생일이 끼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빠! 어떡해?"
"작년처럼 네 생일 때 한꺼번에 초대하면 되잖아"
"그건 안돼"
"왜?"
"친구들과 신문사 애들이 생일하고, 편집국장에 뽑힌 거 하고는 다르대"
"그러면 두 턱씩이나 내라 이 말이야?"
"아빠! 아무래도 엄마한테 한번 혼날 생각을 해야겠지?"

올해도 일주일 전부터 푸름이가 설쳐대는 것을 보면 제 생일을 그냥 조용하게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올해는 학교신문 편집국장에까지 선출되었으니, 지난 해에 비해 더욱 요란하게 치를 모양이었다. 그런 언니의 호들갑을 바라보는 빛나의 눈빛 또한 여간 심상치가 않았다.

"아빠! 언니 서방님이 누군지 알아?"
"푸름이 서방님? 그게 무슨 말이야?"
"가수 전진이가 푸름이 언니 서방님이래"
"???"
"걔가 1980년생이거든. 근데 언니는 1990년생이잖아? 그런데도 자꾸 그래"
"푸름아! 이리 와 봐. 너 이 녀석, 시집 안 간다고 할 때는 언제고? 서방님? 내 참 기가 막혀서"
"아빠! 내 말이 맞지?"
"열 살 차이는 극복할 수 있어"
"뭐어?"


a 은실 피아노 연주회에서의 푸름이

은실 피아노 연주회에서의 푸름이 ⓒ 이종찬

열 살 차이는 극복할 수 있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갑자기 개그 콘서트인가 뭔가 하는 그 프로그램에서 어느 개그맨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알라 나도. 내 알라 나도, 라니. 아무리 웃길 소재가 없다고 해도 이런 말을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스스럼 없이 방영하다니.

아무튼 그런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아이들도 못 말릴 노릇이다. 이제 푸름이는 숫제 시집을 안 간다거나, 아빠하고 같이 살 거라는 그런 말은 아예 기억에 없다는 투다.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도 전진이란 그 가수가 TV에 나오기만 하면 내 서방님이란 말을 아예 예사로 내뱉는다.

"빛나야, 너도 아무나에게 내 알라 나도, 라는 그런 말을 쓰니?"
"아빠는. 나는 그런 말을 쓰는 애들이 제일 싫어"
"너도 언니처럼 좋아하는 서방님이 있니?"
"아빠! 걱정하지 마. 나는 아빠하고 살 거니까"

지난 23일, 일요일은 큰딸 푸름이의 열세 번째 생일이었다. 근데 제 엄마를 졸라 이미 며칠 전에 신문사 식구들에게 피자 두 판과 과자를 사서 돌리면서 제 나름대로는 한턱 크게 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제 생일잔치는 토요일, 아이들에게 햄버거와 콜라를 산 뒤 노래방까지 가서 난리를 피웠다고 했다.

"왜 하필이면 햄버거야?"
"아빠, 나도 미국이 정말 싫어"
"왜?"
"얼마 전에는 여중생 언니들을 장갑차로 치어 죽였잖아? 근데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전쟁까지 일으켰잖아. 아빠, 나는 어른들보다 이라크에 사는 애들이 불쌍해 죽겠어"
"근데 웬 햄버거?"
"나도 다른 걸 사 줄려고 했는데, 애들이 막무가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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