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이었다고 한다면, 그건 지나친 과장일 수는 있어도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다. 그만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수록된 작품 편편에 녹아든 작가의 익살맞은 화법과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이목을 잡아두기에 충분하다. 작품을 읽는 내내 "소설이란 자고로 재미있어야 하는 거야" 라며 불쑥불쑥 끼어 드는 작가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유쾌한 것은, 온전히 웃음으로 책장을 덮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성석제를 두고 진정한 이야기꾼이라고 하는가 하면, 재미를 빼면 남는 게 없는 작가라고도 한다. 한편에서는 희극적인 화법과 낙천성으로 웃음 속에 비수를 숨겨두는 따뜻한 인문주의자라고 하는가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말장난의 전형이라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그가 이 작품으로 동인문학상을 탔을 때, 일제히 언론은 '특유의 입담'과 '웃음 속의 삶의 비애'라며 갖은 상찬을 늘어놓으며 그의 작품을 높게 평가했다. 기존의 날선 비아냥과 쑥덕거림은 상의 권위에 눌려 쏙 들어가 버렸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걸쭉한 입담에서 풀어내는 해학과 풍자만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절대 계몽적이거나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아니 설사 그렇다 해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주는 울림은 다른 성질의 것이다. 보통 작가의 작품을 해학과 풍자라는 수사로 정의하곤 하지만, 기실 이들을 하나로 통용하기에는 각각의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해학이 단순히 대상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 한바탕 놀림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풍자는 웃음의 대상뿐만 아니라 웃는 자까지도 놀림의 과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풍자는 날카로운 활촉을 겨누고 있지만, 해학은 활시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애초부터 해학일수는 있어도 풍자일 수는 없다. 작가도 밝힌바 있지만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독자의 행동이나 의식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누군가를 교정하거나 계몽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공격할 대상이 없고, 비난할 목적이 없으며, 변화시킬 의도가 없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작품에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나는 계몽적인 사람도 아니고, 거기에 직접적인 비판을 하고 싶지도 않다"고 답했다. 그리고 단지 반성할 자가 있고, 변화시킬 자가 있다면 자기 자신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메시지가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동안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격으로 가슴 한쪽을 뻐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의도하지 않았던 풍자가 독자의 가슴을 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기실 가볍게 읽으면 반나절만에 끝을 볼 정도로 한없이 가볍게 읽히지만, 읽고 난 후에 뒷맛이 썩 개운치 않은 잔영을 남긴다. 평균치를 넘어서기보다는 평균치를 한참 밑도는 농부 황만근의 일생을, 묘비명의 형식을 삽입해 서술한 이 작품은 민담적 장치를 이용해 유쾌하지만 씁쓸한 웃음을 안겨준다.
작품을 읽다보면 아무리 냉혈한이라 해도 웃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웃고 나면 꼭 그만큼의 비통함과 비애가 슬며시 스며든다. 작가는 쉼 없이 풀어내는 이야기 보따리에 정신이 팔렸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독자에게 '당신이 웃는 것이 단순히 웃겨서 웃는 것이냐'며 정색을 하고 물어온다. 그때 독자는 다음 대목이 궁금해 분주히 움직이던 손가락을 일순 멈추고, 다음 책장을 넘기는데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웃음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유머이고, 해학이다. 작품이 노리는 꼼수는 거기까지이다. 하지만 배꼽 잡고 웃어대는 독자에게 웃음거리는 '바보 황만근'뿐만 아니라 너도 될 수 있음을 선뜩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는 웃음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 없다. '쾌할 냇가의 명랑한 곗날'의 증경회장과 '순정'의 대기업 회장은 권력의 표상으로 단박에 조롱거리로 내려앉는다.
'욕탕의 여인들'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역시 권력획득의 하나일 뿐이다. 낭만적 사랑이나 객관적인 화자조차 희화화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작품의 중심을 꿰뚫는 것은 대상만 달리한 웃음, 비웃음이다.
이 작품집을 읽을 때 많이 웃었다면 당신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서 조금은 발을 떼고 있거나, 멀찌감치 서 있는 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 웃다가 눈물이 찔끔 났다면, 당신은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웃음이나 유머는 공격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웃음의 대상을 향해 웃음을 날려줄 수 있는 자는 자신이 그 웃음거리와는 어떤 교집합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맘껏 조롱하고 비웃는 작가의 펜 끝에서 유유히 벗어나 웃어젖힐 수 있다. 하지만 쉽사리 웃지 못하는 자, 설사 웃었다 해도 코가 맹맹해지는 자는 그 공격이 자신에게 향할 수 있음을 알기에 가슴 한쪽이 먹먹해 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작품집에서 파안대소했겠지만, 그 만큼의 무게로 씁쓸한 뒷맛을 느꼈을 것이다. 정직하고 우직한 바보 '황만근'을 보며 속이 터졌을지 모르지만, 한편에서는 그를 부려먹기만 하고 무시한 동네사람들에게 적잖은 동질감도 느꼈을 것이다. '황만근'의 우직한 성실함이 만들어낸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평균보다 웃도는 자가 평균보다 밑도는 자에게 품는 모종의 우월감으로 웃음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그가 한 줌의 재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그의 죽음이 마을 사람들의 셈 빠른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을 때 독자는 웃을 수가 없다. 독자들이 동일시하는 인물은 '황만근'이 아니라 계산 빠르게 행동하는 마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온전히 웃지 못했던 것은 나 역시, 선한 자의 우직함과 성실함을 이용하고 조롱하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작가가 이 작품으로 탐욕스럽고 타산적인 세태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해도, 작품이 독자의 손으로 넘겨졌을 때 작품은 하나의 계몽적 메시지를 가지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반성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지만, 독자는 반성을 위해 쓴 글을 통해 자신을 반성한다. 웃음을 가장 아프게 다루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만드는 작품이다.
웃음이 때로 강고한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는 우회적 전술이고, 비웃음의 대상뿐만 아니라 웃는 자신까지도 조롱의 제물로 바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주는 울림은 묵직하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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