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날 아이들이 전해준 편지안준철
아이들에게 받는 편지는 더 없이 행복한 선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마음의 풍경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래서 편지를 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한 달에 한 두번씩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누어주고 애로사항을 쓰게 한다든지 하는 다분히 형식적인 쪽지 상담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운 세세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일날이나 스승의 날이면 아이들이 전해준 편지함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그렇게 흥겹고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말이 적혀 있을까? 1번부터 끝번까지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편지의 내용을 미리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은근한 기대에 젖어 편지함을 열어보다가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기도 합니다.
(…) 그리곤 이번 기회를 통해 말씀 드리는 건데..제 생각인데..우리 반은 선생님께서 좀 편하게 해주셔서 친구들이 지각도 많이 하고 결석도 잦은 편인 것 같네요. 물론 저도 그렇지만.. 제가 생각해도 선생님께서 편하게 해주시고 지각을 해도 별로 꾸짖지 않으시니까 '좀 늦어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는 것 같아요. 솔직히 다른 반에 비해 우리 반 출석부가 더럽잖아요. 선생님의 방법도 좋지만, 약간의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이제 저도 이런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도록 지각을 안 하도록 노력할게요.
이런 편지를 받고 나면 솔직히 마음이 즐겁지는 않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봐 감추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기도 합니다. 지각생 때문에 애를 태우면서도 버럭 화를 내거나 크게 꾸짖는 쪽보다는 대화를 하면서 스스로 생활습관을 고쳐나가도록 지도하고 기다려준 것인데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그런 쓸쓸한 생각에 젖다보면 아이들조차(물론 일부이기는 하지만) 인정해주지 않는 담임의 자율적인 학급운영 방식을 때려치우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약간의 강제성을 띄어 학급을 편하게(담임 편에서) 운영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도 그런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바로 아이가 준 편지의 한 대목 때문입니다.
"이제 저도 이런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도록 지각을 안 하도록 노력할게요."
물론 그런 마음의 다짐들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런 생각에 도달했다는 것이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종의 자기 성찰의 꽃은 조금은 허술한 생활의 틈새에서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강한 이미지를 풍기는 교사가 되기를 꺼려하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만 잘 돌아가는 학급보다는 그 안에 아기자기한 꽃들이 풍성한 학급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1교시가 끝나면 결석자를 보고합니다. 지난주는 2학년 전체가 결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은 우리 반 때문에 '거의' 라는 부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금요일 토요일은 우리 반도 결석이 없었습니다. 그 이틀은 정말 마음이 가벼웠지요. 언젠가 우리 반만 유일하게 결석이 있던 그 다음 날, 결석을 한 두 아이에게 그런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는 말미에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다른 반에 한 명도 결석이 없는데 우리 반만 계속 결석이 있을 때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 지 아니? 그것을 너희들에게 그대로 돌리면 너희들은 못살아. 너희들 지각 많이 해도 한 번도 미워해 본 적 없어. 생활 습관이 하루아침에 고쳐지기는 어려울 테니까 기다려주고 싶은 거야. 그럼 너희들도 잘해야지. 선생님 계속 힘들게 할거야?"
이런 말도 따지고 보면 고도의 전략인 셈이지만, 오래 길들여진 육체의 이기적 욕망을 쉽게 잠재우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미숙함이고, 인간의 미숙함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서 아예 변화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꽃을 피우지 않았다고 내일 꽃이 피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안에 생명이 있는 한 따사로운 햇볕과 바람만 있으면 꽃은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아이들이 준 몇 편의 편지를 더 읽습니다.
'선생님, 아직 다 풀리지 않는 추운 날씨 속에서 선생님 생신이 다가왔네요. 정말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선생님께서 선물을 싫어하셔서 결국은 이렇게 마음을 담은 편지를 선물합니다. 사실 값비싼 선물보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띄어보내는 편지가 제일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선물을 더 좋아하잖아요. 선생님께서 부담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 기쁩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선생님의 제자 지은이예요. 우선 생신 축하드려요. 올해 18살이 되셨군요. 저는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친절하시고, 저희들이 마음을 잘 알아주시는 것 같아서 좋아요. 언제나 저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한 명 한 명 다 챙겨주시는 자상함이 좋아요 (…) 진심으로 18번째 생신을 축하드려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유진이예요. 선생님과 생활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가네요. 선생님이 저희반 문을 열고 들어오셨을 때 교실이 편안하고 따뜻하고 환해졌어요. 선생님과 1년 동안 함께 생활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어요. (…) 선생님 사랑해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 생신이지요? 정말도 축하해요. 올해 연세가? 선생님 제가 이렇게 생일 편지를 써드려서 고맙죠? 선생님은 여전히 활기찬 하루를 보내시는군요. 그런 점에서 본받고 싶은데요. 책을 열심히 집중해서 읽으시다니, 전 열심히 집중해서 못 읽어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죠? (…)'
33명의 제자들이 전해준 사랑의 편지를 거의 다 읽어가고 있을 무렵, 뜻밖의 전화가 왔습니다. 2년 전에 제가 담임을 맡았던 세 명의 제자아이들이 생일이라고 축하 전화를 해온 것입니다.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저를 많이 힘들게 했던 아이들입니다. 그 중 한 아이는 끝내 학교를 그만 두고 말았지요. 그들과 번갈아 가면서 통화를 했는데 하나같이 울음 섞인 목소리였습니다.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저, 선생님 담임하실 때 지각 많이 했잖아요."
"지금은 지각도 않고 학교 잘 다닌다면서."
"그래서 죄송해요. 선생님 계실 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요.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괜찮아. 지금 잘하면 되는 거지."
"선생님, 제가 정말 부끄러워요. 선생님이 사랑으로 대해주셨을 때 잘 하지 못한 것이요."
"그래. 그런 생각을 하다니 고맙구나."
"선생님, 오래 사셔야해요. 제가 성공해서 꼭 선생님 찾아뵐 거예요."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을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런 순간입니다. 전화를 끊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철부지 제자들의 입에서 발음된 부끄럽다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또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것은 용의주도하지 못한, 덜 떨어진, 아이들을 장악하지 못하는, 얼치기 무능교사의 오랜 기다림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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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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