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 육도송... 난 그런 거 없어
희망을 주먹 칼자루서 찾을 순 없지"

2일 다비식 치르는 서암 스님을 회억· 추모하며

등록 2003.04.02 09:20수정 2003.04.07 08:5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4월 2일)은 서암 스님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지난 3월 29일 입적(入寂)한 서암 스님은 제자들이 열반송(涅槃頌; 세상을 떠나기 전 유언처럼 남기는 법어)을 간청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거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

1946년 목숨을 건 용맹정진 끝에 계룡산 나한굴에서 해탈(解脫)한 서암 스님이 훗날 제자와 신도들이 오도송(悟道頌; 깨달음의 순간을 읊은 법어)을 물었을 때는 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난 그런 거 없어"

대한불교 조계종 제8대 종정을 역임한  서암(西庵) 스님이 29일 오전 7시 50분께 경북 문경의 봉암사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서암 종정은 봉암사에서 주석, 정진하던 중 숙환으로 세수 87세, 법랍 68년으로 열반에 들었다고 조계종 측이  밝혔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대 종정을 역임한 서암(西庵) 스님이 29일 오전 7시 50분께 경북 문경의 봉암사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서암 종정은 봉암사에서 주석, 정진하던 중 숙환으로 세수 87세, 법랍 68년으로 열반에 들었다고 조계종 측이 밝혔다.연합뉴스
1993년 성철 스님이 열반한 뒤 조계종 종정에 추대됐으나 서의현 총무체제를 지지한 오점 때문에 종정직에서 쫓겨난 뒤 탈종했던 서암 스님.

그는 나이 서른에 깨달았다는 진리인 본무생사(本無生死; 본래 삶과 죽음이 없다)와 탈종한 뒤 태백산 자락에 지었다는 암자인 무위정사(無爲精舍)처럼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


서암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7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1995년도 다 저물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서암 스님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배낭 하나 둘러메고 대구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종단을 떠난 뒤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돌던 서암 스님이 당시 팔공산의 한 사찰에 은거하고 있으며, 언론인과의 인터뷰는 한사코 거부하지만 불자 청년과의 대화는 간혹 허락하기도 한다는 한 불교계 인사의 귀띔만 믿고 떠난 여행이었다.

대구로 떠나기 며칠 전에 제2석굴암 주지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한 불자 청년이 서암 스님을 친견(親見)하고 싶다는 용건만 전한 채(사실 기자의 종교는 기독교다. 결국 인터뷰 욕심에 거짓말을 한 셈이 됐으니 늦게나마 용서를 빈다), 인터뷰가 성사되리라는 확실한 기약도 없이 무작정 팔공산을 찾게 된 것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

'5·18특별법 정국'으로 불렸던 1995년 연말의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당시는 전두환, 노태우씨를 비롯한 광주학살과 5공 비리의 원흉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던 시기였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이라는 외형적 수사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기와 배경에 다소 불순한 요소가 뒤섞여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5·18특별법을 제정해 '큰 도둑'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라는 시민·사회세력의 줄기찬 요구가 수년 동안 계속됐을 때는 이를 거부했던 김영삼 대통령.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으니 역사에 맡기자"고 변명했던 그는 정작 자신이 정치적 위기에 빠지자 이를 돌파하기 위한 '깜짝쇼'의 수단으로 5·18특별법 제정을 먼저 들고 나왔다. 시민·사회세력은 겉으로는 환영의 박수를 쳤지만 내심으로는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권력자들이 새로운 권력자에 의해 역사의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기말적 현상도 세상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980년 신군부 세력에 동조하고 아부하며 혼과 넋을 팔아먹었던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이 15년이 흐른 뒤 '권력의 끈이 떨어진' 전 씨를 배신하고 능욕하는 꼴불견을 연출한 것이다.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이었던 전두환 씨가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오를 것이 확실해지자 "전 위원장의 고향은 물의 흐름이 남에서 북으로 역곡하는 지세의 한복판이라 해서 예로부터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오고 있다"면서 때아닌 도참설(?)을 제기한 김길홍 경향신문 기자.

덕분에 청와대 언론담당 2급, 1급 비서관을 잇따라 거친 뒤 국회의원까지 됐던 그는 15년이 흐른 후 5·18특별법에 신한국당 의원들은 빠짐없이 서명하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다.

어디 그뿐인가. '민정당 돌격대'였던 현경대씨는 전두환 씨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4대 국회에 설치된 5·18특별법 기초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도운 덕분에 승승장구했던 한승수 씨와 오명 씨는 전 씨가 검찰 수사관들에 의해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당시 문민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범죄집단의 '하수인'이었던 자들이 옛 '수괴'를 단죄하는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재차 나선 것이다.

언론인과 지식인도 놀라운 처세술을 발휘했다. "사심 없는 정치적 리더십에 의하여 이 나라의 장래가 더욱 명랑하게 번영 속에서 발전하기를 염원한다"(1980년 9월 2일자 사설)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던 조선일보는 "(광주학살과 5공비리 등) 그 원죄에 대한 자복이 없는 한 전 씨의 백 마디 말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1995년 12월 3일자 사설)고 '배신의 저주'를 토해냄으로써 비정한 기회주의자의 정수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1980년 당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체육관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청렴 결백한 통치자, 참신 과감한 통치자, 이념 투철한 통치자, 정의 부동한 통치자, 두뇌 명석한 통치자, 인품 온후한 통치자…부강한 나라 만들려는 이 새로운 영도. 오 통치자여! 그 힘 막강하여라"라는 축시를 신문지상에 발표했던 조병화 시인의 변신도 눈부셨다.

15년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이 '청렴 결백한 통치자'라고 칭송했던 그 사람이 범죄집단의 수괴가 되어 감옥에 갇혔음에도 순수파 시인으로서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뗀 채 한국문화예술원장에 취임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그러나 양지와 마른자리만을 즐겨 밟았던 그를 교과서에서는 '국민시인'이라고 가르쳤고, 언론은 '순수시인'이라고 칭송했다.

1995년 겨울을 씁쓸하게 웃겨버린 주류 세력의 '블랙 코미디'를 지켜보며 당시 보통 사람들은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 우울해진 사람들은 비정한 도시를 벗어나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산중의 고승이라도 만나 구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민초들의 그런 심정을 대신해 기자로서 직접 실천에 옮겨보자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인터뷰를 반드시 성사시켜 보겠다는, '겁대가리 없는' 풋내기 기자로서의 오기와 치기도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서암 스님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도됐고,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감히 노스님에게 선문답(禪門答)을 걸어보는 만용까지 범했다.

당시 나는 기사를 작성하며, 서암 스님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것도 산중문답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를 하고 보니, 서암 스님의 말씀이 모두 내 마음을 울렸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서암 스님은 때로는 보수적 세계관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의 말투 하나까지 그대로 살리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벌써 7년여나 흐른 지금 나는 왜 다시 낡은 레코드판을 돌리려 하는가. 거기엔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를 진전시킨 작지만 소중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사바세계는 여전히 오욕과 탐진치로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어 침략과 전쟁이라는 아비규환이 지구촌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갈림길에서 파병논쟁을 벌이느라 한반도가 야단법석의 마당이 됐기 때문이다. 혼탁한 세상을 향해 일갈하는 노승의 목소리가 오늘도 여전히 절실하기 때문이다.

서암 스님의 말씀 중 "악한 일 했는데 선의의 결과가 나올 리 없지. 죄 지으면 남이 몰라도 이미 그 양심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셈이야"라는 말과 "희망을 주먹이나 칼자루에서 찾을 수는 없지"라는 말은 조지 부시와 사담 후세인이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중심을 세워야 바로 판단할 줄 알 수 있지. 남의 엄한 소리 듣고 그저 따라가는 것은 위험해"라는 말과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세상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고 천당도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해"라는 말은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란 항상 희망으로 사는 존재야. 희망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라는 말과 "하나의 등이 천만 개의 등을 밝히고도 불이 남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밝혀야 해"라는 말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일궈야 하는 지구촌 사람들과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슴에 담아야 하지 않을까.

불가에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뜨거운 장작더미 불길 속에서 새롭게 윤회하실 서암 스님과의 7년 전 작은 인연의 기록을 여기 다시 펼쳐내 조사(弔辭)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서암 스님의 명복을 빈다.
관련
기사
- [산중문답기] 서암 스님의 사바세계를 향한 ' 일갈 '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2. 2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3. 3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4. 4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5. 5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