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문답기] 서암 스님의 사바세계를 향한 '일갈'

등록 2003.04.02 13:08수정 2003.04.0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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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지환 기자가 '서암 스님의 사바세계를 향한 일갈'이란 제목으로 <월간 말> 1996년 2월호에 실었던 기사의 전문이다....<편집자 주>

배낭 하나 둘러메고 대구행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겨울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던 어느 날이었다.

행선지는 서암 스님이 묵고 있는 제2석굴암. 팔공산이 북쪽으로 뻗어 오르다 뭉턱 끊긴 절벽 끝에 제비 둥지처럼 걸려 있는 사찰이다. 기자는 절이 건너다 보이는 소나무 숲에 이르러서야 발길을 멈추고 한숨을 돌렸다.


산중의 겨울 해는 유난히 짧은 법이다. 가뜩이나 하늘마저 잔뜩 찌푸려 있다. 골짜기는 이미 짙은 땅거미에 점령당했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능선만이 희끄무레한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 산사의 밤은 고요했다. 풍경은 잠이 들고 돌다리 건너 멀리 법당에서 들려오는 독경 소리만이 은은하게 들려온다.

기자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을 만나려고 천리 길을 달려왔다. 서암. 조계종단의 최고봉인 종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140일만에 종정직을 사임하고 탈종까지 감행한 선승. 그는 지금 납의 한 벌만을 걸친 채 구름처럼 물처럼 천하를 주유하는 자유인이다.

일상 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활선(生活禪)의 주창자이기도 한 서암. 죽비를 들어 잠의 유혹에 빠진 비구의 어깨를 내리치듯 오욕과 탐진치가 소용돌이치는 속세를 향해 그는 어떤 '죽비'를 준비하고 있을까. 기자는 산문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스님."
승방 앞에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주지 스님을 부르자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며칠 전에 서울에서 서암 스님을 뵙고 싶다고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주지 스님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합장했다.


"늦으셨군요. 그래, 공양은 하셨소?"
"아직 전입니다."
"그렇다면 공양부터 하셔야겠구만."

주지 스님이 일러준 대로 극락교를 건너고 대웅전 옆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갔다. '외인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기와장이 땅 위에 푯말 대신 박혀 있었다. 그 경고문(?)은 속세와의 인연은 바로 여기서부터 끊어야 한다는 계명처럼 느껴졌다. 일자형의 긴 선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어두운 마당을 밝혀 주었다.


선방 지하에 있는 식당 문을 열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보살 두 분이 낯선 방문객을 따스한 눈빛으로 맞았다. 잠시 후 쌀과 보리가 적당히 석인 잡곡밥과 나물국에 5찬이 곁들여진 저녁 공양이 나왔다. 맛깔스런 무김치와 갓김치, 들기름에 볶은 호박전과 버섯무침, 시원시큼한 동치미는 담백했다. 시장하던 참이라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 숟가락을 놓자 젊은 보살 한 분이 숭늉을 가져다주었다. 사기그릇에 담겨서일까. 숭늉 맛이 더없이 구수했다.

"스님, 서암 스님."
마루에 무릎을 꿇고 주지 스님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흔들며 불러보았지만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기자는 멀찍이 떨어진 채 선방 마루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연세가 많으셔서….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합시다."
두어 번 더 부르다가 대답이 없자 주지 스님은 기자에게 다가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초저녁잠이 든 서암 스님이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객사에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이 돌변했다.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요란한 풍경 소리가 적막했던 산사를 여지없이 뒤흔들었다. 수첩을 꺼내 하루의 여로를 더듬으며 울부짖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번뇌도 이렇게 찾아오는 것일까. 삭풍이 문풍지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창호지를 적신 뒤 머리맡까지 흘러 넘친 아침햇살이 기자를 흔들어 깨웠다.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햐! 밤새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바뀌었다. 눈발을 토해 내느라 바람은 그렇게 밤새워 울부짖은 모양이다. 해탈이란 것도 정녕 이런 것이던가.

아침 공양을 마치고 법당에 매달려 있는 쌀과 초를 부엌으로 옮겨 달라는 할머니 보살의 부탁을 받았다. 손수레를 끌고 선방 앞마당을 가로질러 가다 보니 마루에 서서 이방인을 내려다보는 노승이 시선에 들어왔다.

"서암 스님께서 건너오랍니다."
앳된 얼굴의 비구니가 객사의 따뜻한 온돌방에서 쉬고 있는 기자에게 소리쳤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주알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까 마루에 서 있던 바로 그 사람, 서암이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회색빛 승복과 털모자 두 벌이 가지런히 벽에 걸려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섬광 같은 말씀을 듣기 위해 왔습니다."
삼배 합장을 올린 뒤 기자의 신분을 밝히며 이렇게 말하자 서암 스님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는 한 동안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기자가 막무가내로 간청하자 한 동안 묵묵히 앉아 있던 서암이 대답했다.

"멀리서 찾아온 정리를 생각해 몇 마디만 하지. 인터뷰라고 생각하지 말고 노인과 청년의 격의 없는 대화라고 생각했으면 하네."

기자는 대뜸 이런 엉뚱한 질문부터 했다.

- 스님,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권력 있고, 돈 많고, 오욕락이 행복인 줄 알지만 하루를 살아도 사는 의미를 알고 사는 것이 참 행복이지.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공자의 말씀이 조금도 틀리지 않아. 사는 뜻, 목적, 원리를 알지 못하고 백년을 산들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아. 사는 뜻을 알면 위대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지."

서암 스님은 진지했다. 선문답은 계속됐다.

- 어떻게 위대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나요.
"향락에의 도취는 자기파괴에 이르는 첩경이지. 욕락에 초연하고 이성을 가꾸려는 노력을 해야 빛이 보이고 자기의 위대함을 알 수 있어. 참다운 자기 인생을 가꾸어 나가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잘 살 수 있는 등불을 밝혀야 해. 만인과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위대한 자기를 발견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지."

- 요즘 세상에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항상 희망으로 사는 존재야. 희망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 하지만 무엇보다 사는 뜻을 알고 사는 게 중요해.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왜 사는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내 인생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항상 생각하지. 그 화두를 평생을 걸고 해결하려는 사람이야말로 진지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실제로 누구나 진지하게 사는 것은 아니야. 그 모습을 보면 천태만상이요 천차만별이지.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도 있지."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공장 사장이 독한 폐수를 몰래 버리면 환경이 파괴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병든 것이야. 생명이 죽는 데 어찌 그럴 수 있겠어. 저만 살려고 하면 저도 못살고 남도 죽이는 결과를 낳지. 설사 남 모르게 한다 하더라도 자기 양심까지 속일 수는 없지. 남이 죽더라도 돈만 벌면 최고라는 정신에 문제가 있어. 1천만원 번다면 5백만을 들여서라도 폐수 처리 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해. 콩 심으면 팥 안 나와. 악한 일 했는데 선의의 결과가 나올 리 없지. 죄 지으면 남이 몰라도 이미 그 양심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셈이야."

-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은 뇌물을 받았다고 해서, 또 한 사람은 내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 대통령을 모셨던(?) 국민들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곤혹스럽기만 합니다.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우왕좌왕(右往左往)할 필요도 없고, 일사일사(一事一事)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필요도 없어. 그들은 분명 큰 죄를 지었지. 스스로의 표현대로 못난 짓을 한 거야.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 처벌하라고 할 때는 역사에 맡기자고 하고 왜 이제 와서야 응징을 외치냔 말야. 국민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당연하지. 전직 대통령들을 두둔하자는 게 아냐. 하지만 그들과 한솥밥을 먹던 김영삼 대통령이 과연 그들을 단죄할 자격이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군. 모든 게 어린애 소꿉장난 같아."

그는 우리 사회가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윤리 도덕이 사라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갈 길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깊은 산중에 앉아 있는 그가 어떻게 세상일을 알 수 있을까.

"아, 이 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세상이 움직이는데 내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를 수 있나. 나라가 온통 흔들리는데 어찌 나 혼자만 안 흔들릴 수 있나."

- 정치인들은 사는 뜻을 알고 있다고 보십니까.
"정치인들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똑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지. 하지만 대다수는 정신이 병들어 있어. 그런 넋빠진 인간들이 정치를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지. 단 한 명도 제대로 된 놈이 보이지 않아."

- 지식인은 어떻습니까
"탁류와도 같은 세상에서 정신세계를 책임진 지식인들의 역할은 막중하지. 그런데 그들마저 오욕에 흠뻑 젖어 버렸어. 그들이 할 일을 안 하니 정신세계가 썩는 것은 당연하지.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데 주머니에 지식만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 하고 있어. 그러니 교수가 제 애비를 죽이고 학교에서 폭력이 판을 치지. 이 모든 것이 그런 넋빠진 지도자와 지식인들 때문이야."

그는 이수성 서울대 총장의 총리 취임에 대해서도 마뜩찮은 듯 했다.

"소위 명문대 총장 하던 사람이 뭐 하랬다고 턱 나가서 하니 얼마나 딱한 일이야. 학자의 가치관이고 뭐고 없으니 한심한 노릇이지. 백과전서와 옥편 같은 지식 주머니와 보따리만 있지 참된 지식인이 없어. 한심한 나라야. 일자무식이라도 옳고 그른 것은 판단할 줄 안다고."

- 지식인이 행정부에 들어가 개혁 작업에 동참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말장난 하지 말라고 해.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들이 있어야 안에서도 제대로 할 수 있는 법이야."

그렇다면 그는 희망을 어디서 찾고 있는 것일까.

"유일한 희망은 청년이야. 하나의 등이 천만개의 등을 밝히고도 불이 남듯 청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밝혀야 해. 그 불을 높이 밝히면 나라가 밝아질 수 있지 않겠어?"

- 청년들에게 문제는 없습니까.
"청년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지 지금 잘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야. 청년들이라도 제대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뭘 모르고 데모하는 것 같애."

- 그렇다면 청년들이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세상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고 천당도 만들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해. 내 자신이 창조자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거지. 그럴 때 역사도 보이고 자기의 튼튼한 힘도 보인다 이 말이여."

- 자신을 먼저 찾을 때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자기 중심을 세워야 위대한 이론을 바로 볼 줄 알고, 바로 판단할 줄 알고, 바로 비판할 줄도 알게 된다 이 말이여. 남의 엄한 소리 듣고 그저 따라가는 것은 위험해."

그는 우선 좋은 책을 많이 읽을 것을 권했다. 책을 읽되 자신 속에 비추어서 비판하며 읽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무엇이든지 비판정신을 가지고 임할 때 산지식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내 나이 여든 둘일세. 자동차도 오래 타고 다니면 폐차시켜야 한다더구만. 껍데기를 빌려 짧지 않게 세상을 살았으니 이제 돌아갈 때도 됐지. 나도 청년의 새 몸을 입고 다시 돌아와 거들어야겠어."

- 해방 50년은 곧 분단 50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남과 북은 여전히 갈려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북과 이남이 원수처럼 살고 있지만 진짜 원수는 일본과 미국이야. 강대국이 남과 북을 갈라놓은 거야. 그들은 약소민족을 돕는 게 아니야. 미국이나 일본은 말로는 통일을 원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통일을 절대 바라지 않아. 다 야심을 가지고 하는 말이지. 그런데도 우리 국민들은 바로 보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지. 남과 북을 어린애 싸움시키듯 하고 있어. 절대 통일은 우리 민족이 이뤄야 해. 그런데 정부는 정신차리지 못하고 매일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있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백성을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알아야 하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범에 물려 가고 물에 빠져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이 있잖아. 제 정신을 차려야 한단 말이야. 지금 제대로 되는 것 있나. 세계는 눈을 뜨고 있는데 제 정신이 없어."

-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를 주창하고 있는데요.
"세계화면 제일인가. 저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제 나라 바로 잡지 못하면서 무슨 세계화야. 성현들도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했잖아. 서양에서도 동양에 눈을 돌리고 있는데 도리어 우리는 자신의 위대함을 보지 못하고 있어. 지도자들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갈 길 몰라하는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데 걱정이야."

그는 "바른 이치를 알아야 해. 외부적 혼돈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어야 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나 세계화 이전에 '자기 중심 세우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 국민들은 책임이 없습니까.
"국민들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거지. 눈밝은 사람이 나와 밝은 횃불을 들어야 하는데."

- 희망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자각운동을 해야 해. 희망을 주먹이나 칼자루에서 찾을 수는 없지.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아는 판단에서 희망은 나와. 올바로 아는 것이 힘이야. 모든 국민이 정신 차리고 나서면 대통령과 정치가들이 저렇게는 못해. 옥도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도 공부하지 않으면 도를 몰라. 하루를 살아도 떳떳하게 사는 철학을 가진 국민이 많을 때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어."

서암 스님은 대화가 끝나고 기자가 삼배합장을 하려 하자 만류했다. 형식보다 진정한 마음이 중하다는 말과 함께. 기자가 마당을 가로지르고, 극락교를 건너고, 산문을 지날 때까지 서암 스님은 내내 마루에 서 있었다.

하산길의 하늘은 투명했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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