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수술을 준비하고 있는 김소중씨유영순
아빠가 정연이 곁을 떠난 것은 지난 99년.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때 동생 혁춘이는 2살이었다. 아빠는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 가정환경 조사서 아빠 직업란에 판사나 검사를 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좋아했다. 그런 아빠가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연일 나왔다.
국가보안법이 무엇이고, 반국가단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아빠에게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어머어마한 딱지를 붙였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건 아빠는 정연이에게 늘 따스한 분이었고, 푸근하고 넓은 품이었다. 그런 품이 여름 햇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햇살이 사라짐과 동시에 엄마도 빼앗겼다.
생계를 책임진 엄마는 학원 강사 생활로 밤늦게 들어왔다. 엄마는 퇴근하며 아이들 자는 모습을 보았고, 정연이는 등교하며 엄마 자는 모습을 보았다. 일요일이면 아빠 면회를 가야했기에 엄마는 바빴다. 아빠가 계신 대전까지 갔다오면 또 밤이었고, 엄마는 정연이와 혁춘이 잠든 모습을 보며 잠들었다.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혁춘이가 울면 정연이가 달랬고, 혁춘이에게 말을 가르친 것도 정연이었다. 소꿉놀이를 하면 엄마 노릇을 한 것도 정연이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목요집회나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에서 아빠의 석방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고, 읽은 것도 정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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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4년간 정연이는 어린이 세계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른이 되었다. 정연이가 홀로 어른되기 연습을 하는 사이에 남쪽의 대통령은 북쪽의 국방위원장을 만나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으며, 그 사이 남과 북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손에 손을 잡고 동시 입장을 했고, 그 사이 북의 응원단은 부산 아시안 게임에 와서 북녘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했다. 그 사이 너무도 많은 남쪽 사람들이 북의 금강산을 다녀왔고, 남녘 이산가족들은 북의 가족을 만나 부둥켜안고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연이가 아빠 품에 안겨 실컷 울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단지 무미건조한 '양심수의 딸'이라는 꼬리표만 따라붙을 뿐이었다.
재작년 기어이 엄마가 사고를 당했다. 생계를 책임지랴, 면회 다니랴, 아빠 석방 운동하랴, 피곤이 누적된 엄마는 자유로에서 졸음 운전을 하다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사람들은 살아난 것이 용하다했다. 그 엄청난 사고 앞에서 정연이가 남긴 말은 한마디였다.
"그래, 엄마는 좀 쉬어야 해. 이참에 푹 쉬어."
엄마의 몸이 회복되고 얼굴이 제 모습을 찾기까지 몇 달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그 기간에 정연이는 늘 엄마 곁에 있었다. 아빠가 곁에 없는데 엄마까지 빼앗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올 2월. 정연이는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학생 대표로 상을 받았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게 주는 상 대표로 정연이가 단상에서 상을 받았다. 아빠가 없는 졸업식장에서 정연이는 당당하게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이렇게 컸어요. 정연이가 이렇게 컸어요. 훌륭하지요? 아빠 딸답지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양심수 석방 요구가 높아졌지만, 취임식과 동시에 연례 행사처럼 해오던 양심수 석방 소식은 없었다. 아빠 담당 변호사였던 강금실 아줌마가 법무부 장관이 되었는데도, 전두환도 하고 노태우도 하고 김영삼도 했던 양심수 석방이 없었다.
엄마는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면서 서울구치소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하였다. 엄마가 천막 농성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밤이면 엄마와 함께 잘 수 있었지만, 천막농성 시작 후부터는 토요일, 일요일에만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3월의 바람은 차가웠다. 주변 분들은 천막 농성장에서 자면 감기 걸리니까 집에 가서 자라고 했지만, 엄마랑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는 혁춘이의 바람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엄마랑 혁춘이랑 정연이랑 밤새 장난치며 이야기하며 천막 안에서 잤다.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는 전국의 교도소를 걸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빠 석방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며 전국 20군데 교도소를 걸어간다고 했다. 몸이 약한 엄마가 걱정되었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아빠가 나올 수만 있다면 정연이도 토요일, 일요일에는 엄마랑 함께 걷겠다고 했다.
3월 22일 토요일 오후. 3주간의 천막 농성을 마치고 '양심수 석방과 수배 해제를 위한 전국 교도소 순례' 출발식이 있는 날 정연이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엄마가 있는 서울구치소 앞으로 갔다. 엄마랑 헤어지면 또 1주일을 기다려야 했기에 혁춘이랑 부지런히 갔다. 집회가 거의 끝나가고 단장을 맡은 최진수 아저씨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연설 중에 엄마가 암이라고 했다. 엄마가 암이라 교도소 순례를 못하고 남아 있는다고 했다. 교도소 순례 하루 전날 암선고를 받았다고 했다. 의사가 왜 이제야 왔냐며 호통을 쳤단다. 엄마가 암이란다. 아빠도 없는데 엄마가 암이란다. 고생만 한 엄마가 암이란다. 엄마가 암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