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95

분타 지위 협정서 (5)

등록 2003.04.04 14:35수정 2003.04.0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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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넨, 성주께서 그깟 놈들에게 사과를 해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맞아! 자네 혹시 놈들에게 뇌물이라도 먹은 것 아닌가?"

흥분한 당주들의 말에 철마당주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자, 조용히 하고 내 말 좀 들어 보게.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있네. 자네들 이위소라는 이름을 알지?"
"이위소? 무천서원의 원주이자 영세제일학이라 불리던 무궁공자 이위소 대학사를 말하는 겐가?"

"그렇네."
"흐음! 이 시점에 그분 이야기는 왜 하는가?"

이위소라는 이름이 나오자 다소 흥분해 있던 당주들의 얼굴에 일제히 흠모의 빛이 흘렀다.

무궁공자 이위소가 누구이던가! 무천서원이 생긴 이래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고, 최단기간 만에 원주 자리에 오른 전무후무할 대학사이다.

그래서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이지만 무림천자성의 모든 무인들로부터 진정으로 흠모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이름만 듣고도 흥분을 가라앉힌 것이다.


"전대 성주께서 서거(逝去)하시기 전에 친구 분과 술자리를 하시면서 나누신 말씀이 있었네."
"가만, 전대 성주님의 친구라면 태상장로 직을 마다하고 금릉 무천장주를 하시겠다고 한 비돈 천화협 대인을 말하는 겐가?"

이번에도 당주들의 얼굴에 흠모의 빛이 어렸다. 막강한 자리에 앉을 충분한 자격을 지녔으면서도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본보기로 보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네. 두 분께서 말씀을 나누실 때 나는 성주님의 마동(馬童)이었는지라 측근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지."
"하하! 그러고 보니 자네는 정말 출세한 거야."

"이 사람아! 그러는 자네는… 성주님의 검동(劍童)이었잖아."
"핫핫! 그런가? 핫핫!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세."

철검당주는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되었다 판단하였는지 얼른 뒤로 빠졌다.

"그때 태상장로께서 성주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네."

"핫핫! 나는 천하에서 두뇌가 가장 뛰어난 두 집단을 꼽으라면 당연 선무곡와 유대문을 꼽겠네."
"그런가? 왜 그렇지?"

"유대문 놈들은 이해타산에 있어서 만큼은 천하제일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영악하고 밝지. 속에 시커먼 구렁이를 한 마리씩 키우기는 하지만 놈들은 힘으로 다스리면 꼼짝도 못하지."
"그런가? 유대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어 그런대로 이해를 하겠네. 하지만 선무곡은…? 선무곡이라면 화존궁과 왜문 사이에 있는 조그만 문파가 아닌가?"

"그렇네. 선무곡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는가?"
"글쎄…? 선무곡이라면 늘 화존궁의 핍박을 받던 문파라고 들었네. 하도 칠칠맞아서 늘 화존궁에 공물이나 갖다 비치고 그랬다고 들었네. 그러다가 얼마 전에는 왜문이 강점했던 문파고…"

"맞네! 그 선무곡을 말하는 것이네."
"으음! 내가 알기론 우매하기 이를 데 없는 작자들만 모인 곳이 거기라고 들었는데…? 놈들은 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고 붕당(朋黨)이나 만들어 서로 싸우느라 밖을 돌볼 줄 모르는 놈들이라고 들었네만…"

"하하! 그랬지. 또 아는 바가 있는가?"
"뭐라더라…? 맞아! 노론 소론, 남인 서인 뭐 이런 것들… 그것 때문에 발전하고 싶어도 발전할 수 없는 곳이라고 들었네."

"핫핫! 바로 보았네. 선무곡의 고질적인 병폐가 바로 그런 것이지. 왜문에게 당한 것이 어디 이번 한번 뿐인줄 아는가?"
"그래? 뭔 일이 또 있었는가?"

"핫핫! 오래 전, 임진년(壬辰年)에도 된통 당했었지.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다가 또 당한 것이네."
"그래? 그런 선무곡이 뭐가 뛰어나다고 하는 건가?"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오래 전 선무곡은 그렇지 않았네."
"그랬는가?"

"한때는 화존궁도 함부로 못하던 곳이 바로 선무곡이라네. 광개토대제(廣開土大帝)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을 때에는 화존궁은 물론 인근 문파 모두가 벌벌 떨었었지."
"흐음! 그런 일도 있었는가?"

"그렇네! 그런데도 그 모양 그 꼴이 된 것은 더 이상 뛰어난 지도자를 가져보지 못한 것 때문이네. 그래서 늘 외세에 당하고만 살았지. 하지만 두고 보게.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하! 언젠가는 선무곡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네. 핫핫! 아무리 먹장구름이 껴있어도 바람이 불면 찬란한 빛을 드러내는 법이지. 안 그런가?"


"핫핫!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아하! 그래서 유대문에게 본성의 은자를 모두 맡긴 것이군."

"그렇네. 그런 이유 때문이지. 그리고 태상장로님의 이런 말씀이 있었기에 선무곡이 남북으로 나뉘어 싸울 때 본성에서 선무곡을 지원한 것이네. 핫핫! 워낙 쬐끄만 문파라 은자도 얼마 안 들었지. 덕분에 본성의 명성은 만 천하에 드러났고."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구먼…"

당주들은 왜 별 볼일 없는 선무곡에 제자들을 주둔시키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네. 본성에서는 왜 유대문은 중용(重用)하면서 선무곡은 그렇게 놔둔 것인가?"

철검당주의 물음에 이번엔 비문당주가 나섰다.

"이 사람아! 그걸 몰라서 묻는가? 자네들 선무곡의 곡주 가운데 철심냉혈이라는 자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지?"
"철심냉혈? 누구더라? 아하! 선무곡 수석장로에 의해서 시해(弑害) 당한 자를 말하는 거지?"

"그렇네. 그자가 왜 자신의 심복 중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수석장로에 의하여 시해 당했는지 아는가?"
"글쎄…?"

"쉿! 이건 비밀이니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말이니 절대 말을 옮기면 안 되네."

비문당주가 식지(食指)로 입술을 가리면서 나직이 속삭이자 당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하였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비밀이라는 것은 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알겠네. 철저히 함구(緘口)할 터이니 속 시원히 말해 보게."
"철심냉혈 그놈 때문에 무천서원의 원주이셨던 무궁공자께서 원주 직을 버리고 선무곡으로 돌아가신 것이네."

"왜?"
"본성의 병기 중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천뢰탄과 버금갈 병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네."

"그랬는가? 그런데 그게 뭐 비밀인가? 무궁공자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큰 비밀이 아니지 않는가?"
"후후후! 과연 그럴까?"

돌연 비문당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눈치 빠른 철마당주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일이?"
"그렇네. 자네의 생각이 맞네."

오래 전, 불타께서 영취산 정상에 군중들이 모여 있을 때의 일이다. 설법 자리에 오르신 부처께서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아무런 말도 없자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일컬어지는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에서는 염화시중(捻華示衆)의 미소라고 한다. 같은 맥락의 말로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있다.

비문당주와 철마당주가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의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검당주는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게 무슨 말인지 말을 해야 알 것 아닌가? 답답하니 웃지만 말고 말로 해보게."
"하하!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들었는데 자네만… 좋네. 우리끼리 있으니 속 시원히 말해 주겠네."

"이보게, 이왕이면 자세히 말해주게. 알았지?"
"하하! 알았네. 철심냉혈이 무궁공자를 부른 것은 천뢰탄을 만들기 위함이었네. 알다시피 무궁공자는 무천서원의 원주였으니 모든 서고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이 있었지."
"당연하지. 원주인데 어디인들 못 갔겠는가?"

맞장구를 쳐주자 비문당주는 신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무천서고 가운데 가장 귀한 책들만 모아두는 곳에는 해동 땅에 살던 최무선(崔茂宣)이라는 사람이 지은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과 화포법(火砲法)이라는 서책이 있었다고 하네."
"그게 뭔데?"

"그게 바로 본성에서 천뢰탄을 만든 때 단초가 된 책이네."
"으음! 그런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생각해보게. 무공공자가 누구인가? 흔히들 뛰어난 기재(奇才)를 다른 말로 표현할 때 어떤 말을 하는가?"
"그야 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이나 문일지백(聞一知百)이라고 하겠지."

"맞네! 그런데 무궁공자는 천재 중의 천재였으니 가히 문일지만(聞一知萬)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그 책을 보았다면 천뢰탄을 만들 방법 또한 알아냈다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지."
"으음! 그야 그렇지. 그분의 두뇌라면 충분하고도 남았겠지."

"그때도 선무곡에는 본성의 분타가 있네. 그런데 거기서 보내온 첩보에 의하면 은밀히 천뢰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하였네. 물론 무궁공자가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겠지."
"……!"

"당시 본성에서는 세력을 확장하던 터인지라 다른 문파에서 천뢰탄을 가지게 되는 것을 극히 꺼렸다네."
"그래서?"

"그래서 무궁공자와 철심냉혈이 죽도록 한 것이지."
"무어…? 그렇다면 철심냉혈과 무궁공자의 죽음에 본성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네. 당시 우리 비문당에서는 선무곡의 수석장로였던 자에게 서찰을 하나 은밀히 보냈네."
"무슨 서찰?"

"천뢰탄이 제조되면 본성으로서는 부득이 천뢰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지."
"그게 무슨 말인가?"

"오늘날 본성이 무림을 장악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뢰탄이네. 왜문을 혼내줄 때 사용했었지. 이것의 파괴력을 알기에 다른 문파들이 감히 본성을 넘보지 못하는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네."
"그야 그렇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런 천뢰탄을 모든 문파가 다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그럼 어느 문파가 지금처럼 고분고분하게 굴겠는가?"
"으음! 그건 그렇군."

철검당주가 심각하다는 표정을 짓자 비문당주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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