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97

빛나는 대머리 독두환(禿頭煥) (2)

등록 2003.04.06 00:01수정 2003.04.0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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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착하였을 때 신분증을 만들어 주겠다면서 시뻘겋게 단 인두를 들고 다가서던 옥졸의 모습, 그리고 이마를 지질 때의 노릿한 냄새와 더불어 죽을 것만 같던 통증.

단 하루도 빼지 않고 배정되는 끝도 없을 작업량과 짐승들도 먹지 않을 만큼 허여 멀건한 죽, 그리고 땀과 오물 냄새가 뒤섞여 도통 익숙해지지 않던 퀘퀘한 냄새!


조금만 꾀를 부리면 어김없이 내리쳐지는 지독한 매질.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절로 튀어나오던 비명. 덕분에 등가죽이 성할 날 없이 온통 피딱지로 뒤덮여 있었다.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을 지독한 어둠 속의 독방과 그 속에서 밤새 탈출로를 뚫기 위해 하도 곡괭이 질을 하는 바람에 뻣뻣해진 손가락을 주무르고, 졸린 눈을 비비던 일 등등이 떠올랐다.

무림지옥갱에서의 기억 가운데 가장 생생한 기억은 무엇보다도 피거형이었다. 자신이 배설한 오물에 빠져죽기 직전 내지르던 냉혈살마와 비접나한의 처절한 울부짖음, 그리고 가득 찬 오물이 입술을 넘나들 때의 절망감 등등이 떠올랐다.

상념이 스치는 동안 이회옥은 멍한 표정으로 힘차게 망치질을 하는 대장장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참 이러고 있을 즈음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핫핫! 녀석, 여기서 뭘 그렇게 망하니 쳐다보고 있느냐?"
"엇! 다, 당주님."


"핫핫! 이제 우리 철마당으로 가야지? 핫핫!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다. 핫핫! 이보게, 방 당주 오늘 잘 마셨네. 아참! 제수씨들, 오늘 음식 맛있었소이다. 그럼 다음에 또…"
"예! 안녕히 가세요."

"핫핫! 잘 가게."
"핫핫! 가자."
"예? 아, 예에…!"


당주들을 배웅을 하기 위해 나온 철마당주의 뒤에는 두 여인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부인들인 듯하였다.

무림천자성에서도 철마당주의 두 부인 연화부인과 수련부인은 은 유명인사였다. 천하제일 바람둥이라 할 수 있던 철마당주로 하여금 더 이상 바람피우지 않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이었기에 용모를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지만 이회옥은 왠지 눈에 익은 듯하여 자세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술 취한 철마당주가 비틀거리면서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핫핫! 기분 조오타! 가자. 핫핫! 어서 우리 철마당으로 가자."
"예? 예에!"

잠시 후, 이회옥은 비틀거리던 철마당주를 그의 거처에 눕히고 비룡이 있는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워낙 체구가 큰 사람이기에 웬만한 근력으로는 부축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룡갑으로 단련된 근육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며칠 후, 이회옥은 또 다시 별원으로 불려갔다. 비룡을 타보고 싶다는 전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철마당주 없이 혼자서였다.

"핫핫! 역시 대단한 말이야. 좋아, 아주 좋아."

한바탕 달리고 돌아 온 철기린은 흡족하다는 듯 비룡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는 무림천자성 별원의 식솔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처음 철기린을 태운 비룡이 담장을 향하여 전력으로 질주할 때에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심하게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볍게 담장을 뛰어 넘자 이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무언공자만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지 무표정했다. 잠시 후 별원 사람들은 모두 한번씩 비룡을 쓰다듬었다.

이때 이회옥 역시 만족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자신이 칭찬 받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이런 날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비룡이 타고 싶다 하여 별원으로 향하였다. 철기린이 비룡을 타고 나간 뒤 반 시진 정도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할 일이 없어 무료해진 이회옥은 양지바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흠! 네가 비룡을 조련한 이회옥이라는 아이냐?"
"엇! 누, 누구…?"

하릴없어 작대기로 낙서를 하고 있던 이회옥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별원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보다는 상전이기 때문이었다.

"하하! 네 녀석이 날 알아서 무엇하게?"
"죄, 죄송합니다."

"핫핫! 본좌는 무언공자라 한다. 철기린의 아우지."
"소, 소인은…"

"그래, 철마당의 이회옥이라 하였지?"
"그, 그렇습니다."

이회옥으로써는 심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철기린에게 문제가 발생되면 대신 천하를 운영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묻겠다. 비룡만큼 빠른 말이 또 있느냐?"
"예에…? 그게 무슨…?"

"비룡만큼 빠른 말이 있느냐고 또 있느냐고 물었다."
"지, 지금은 어, 없습니다."

"지금은 없어? 그렇다면 방법이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군."
"거, 거야… 예!"

이회옥은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상념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의 비룡은 세상의 어떤 말보다도 빠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이 있다.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을 보면 공자께서 제자인 안회(顔回)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 장래에 그들이 지금의 우리를 따르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것과 유사한 뜻으로 장강후랑최전랑(長江後浪催前浪)이라는 말도 있다.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에 밀려간다는 말이다.

이외에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나,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도 어떤 면에서는 일맥 상통하는 말일 것이다.

지금은 비룡이 빠르나 앞으로 태어날 망아지들을 생각하면 가장 빠르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흐음! 그래? 알았다."

무언공자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하다가 급히 사라졌다. 이회옥은 대체 왜 비룡만큼 빠른 말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천하에서 비룡만큼 빠른 말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비룡과 같은 빠르기를 지닌 말을 또 만들어내려면 방법은 하나뿐일 것이다. 비룡이 그랬듯이 새로 태어난 순종 대완구 망아지를 새롭게 조련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회옥의 아주 특별한 조련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의 이런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비룡이 담장을 훌쩍 뛰어 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핫핫! 이놈은 타면 탈수록 마음에 든다. 핫핫!"
"……!"

철기린이 비룡의 어깨를 다독이는 모습에 이회옥은 자신이 칭찬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핫핫! 이런 깜박했군. 본좌가 네게 상을 내린다고 하고는 지금껏 아무것도 안 해줬지? 좋아, 원하는 것이 있느냐?"
"예?"

느닷없는 말에 이회옥은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핫핫! 녀석, 상으로 무얼 받고 싶은지 생각해 둔 것이 있느냐는 데 왜 그렇게 놀라느냐?"
"예?"

"핫핫! 녀석, 하고는… 전에 상을 내린다고 했었잖아. 잊었었어? 뭘 원하는지 말해보라니까."
"예?"

"진급시켜줄까?"
"예? 아, 아니요."

"핫핫! 그럼, 뭐 갖고 싶은 게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럼, 그럼 뭘 원하는데?"
"소생은 원하는 게… 어, 없습니다."

"하하! 녀석, 바짝 얼었군. 본좌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느냐? 핫핫! 좋아, 천천히 이야기해도 좋다. 헌데 하나만 묻자. 비룡만큼 빠른 말이 또 있느냐?"
"예? 그게 무슨…?"

"비룡만큼 빠른 말이 또 있느냐고 물었다."
"지, 지금은 어, 없습니다."

"좋아, 그럼 방법도 없느냐?"
"그, 그건 아닙니다.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방법은 있…"

이회옥의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철기린의 음성 때문이었다.

"핫핫! 그래? 좋아, 그렇다면 그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봐라."
"예! 철마당에는 순종 대완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숫놈과 암놈을 교미시켜 망아지를 얻은 다음…"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철기린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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