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단말마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잠시 조용했었다. 그리고 대략 반각이 지난 후부터는 짐승 앓는 듯한 소리가 난 것이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이회옥은 슬그머니 소리가 난 정실로 향하였다. 다행히 창문에 구멍이 뚫려 있어 안을 볼 수 있었다.
황촉의 불빛 아래 보인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벌거벗은 남녀가 침상 위를 뒹구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남녀간에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이회옥으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사내는 낮에 판결을 내린 정의수호대원이었다.
그런 그의 아래에 깔려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지르는 여인은 놀랍게도 송사를 제기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처음엔 만난지 불과 반나절만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하였으나 남녀간의 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였다.
정의수호대원들이 말하길 세상의 여인들은 자신들만 보면 환장한다고 하였다. 장차 무천장의 장주가 될 재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여 어떤 여인은 벌거벗은 채 육탄돌격도 마다하지 않는다면서 이를 자랑스러워하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부친을 죽인 원수를 처벌해달라고 왔던 여인이 흉수를 풀어준 사람에게 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낮에 얼마나 억울하다며 울부짖었던가! 그런 그녀가 마음을 돌려 그날 밤에 스스로 몸을 준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방면되었던 백정은 다시 잡혀왔다. 그리고는 즉각 참수형에 처해졌고, 수급은 효수되었다.
이것을 본 이회옥이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판결을 내린 대원에게 처녀를 따먹는 맛이 어땠느냐는 다른 대원의 물음에 빙그레 미소로 화답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따먹는다는 것이 무언인지를 확연하게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본 이회옥은 정의수호대원들이 반드시 정의만을 수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되어 많이 실망스러웠다.
그의 이런 실망은 선무곡에 당도한 후 더욱 크게 증폭되었다.
남의 집에 가면 당연히 집 주인을 찾아 수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사람된 도리일 것이다. 선무곡이 아무리 힘없는 문파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무림의 문파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장문인인 곡주를 찾아 예의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무림인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덕목일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곡주를 예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참다 못한 이회옥이 가서 인사라도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선무곡 같은 작은 문파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도리상 그런 것이 아니라면서 가겠다고 일어서는 이회옥을 만류하기까지 하였다. 일개 정의수호대원들인 자신들도 가지 않는데 어찌 순찰이 가려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원을 찾아 질탕하게 먹고 마셨고 다음 날엔 올 때처럼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정의를 수호한다는 사람이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이회옥의 실망이 컸던 것이다.
무림천자성 선무분타의 분타주 백안무발(白顔無髮) 허보도(許報陶)는 이회옥이 당도하자 정중하게 영접하였다.
직함은 자신과 거의 동등한 순찰이었고, 나이도 어리기에 하대를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분타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순찰원에서 보내진 밀지 때문이었다.
거기엔 이회옥이 제왕비를 지니고 있고, 철기린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사람이니 추호라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지 않아야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 쓰여 있었다.
따라서 조만간 자신보다 상전이 될 것이라 판단한 분타주는 도에 넘치도록 저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이회옥이 도착한 다음 날 분타주는 선무곡에 한가지 요구를 하였다. 전각과 마구간을 새로 지을 터를 달라는 것이다.
전 같으면 이런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비록 선무곡의 영토이기는 하지만 형식적인 통보만 하고 공사를 시작하면 되었다. 그래도 선무곡에서는 일언반구도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거의 즉각적으로 안 된다는 답변이 있었던 것이다.
허보도가 이회옥을 위해 새로 전각과 마굿간을 지으려는 곳은 풍광 뛰어나기로 이름난 선무곡에서도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적당한 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말들이 뛰어 놀기 좋은 초지가 펼쳐진 곳이다.
게다가 군데군데 아름다운 연못도 있고, 기기묘묘한 기암괴석들도 적절히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용한 곳이었다.
문제는 그곳이 선무곡의 조사전이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세상에 누가 있어 외인에게 조사전의 자리를 내어 주겠는가?
제아무리 귀한 손님이라 할지라도 선조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조사전만큼은 절대 비워주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야말로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타주가 이 자리를 선택한 것은 순전히 이회옥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선무곡에서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호기를 부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거의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치자 얼굴이 뻘개지지 않을 수 없었다. 창피함 때문이었고, 그로 인한 분노 때문이었다.
답변서가 온 날 허보도는 선무곡에서 동의를 하건 말건 반드시 그 자리에 전각과 마구간을 지어야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였다. 이 소문이 번지자 선무곡의 젊은 제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연일 조사전 자리에 앉은 채 농성을 시작하였다.
사람이 앉아 있으면 공사를 할 수 없는 법이다. 하여 공사는 시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산책을 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소리치는 것을 보고 이일을 알게 된 이회옥은 선무곡에 전혀 피해가 없을 좋은 자리를 따로 찾아볼 것이니 요청을 철회해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백안무발 허보도는 아니었다.
이회옥이 보는 앞에서 하찮은 선무곡도들에게 망신당했다 생각하여 그런지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러자 선무곡도들 역시 더욱 강경하게 안 된다고 하였다.
조사들의 영령이 서린 자리에 무림천자성의 전각과 마구간을 세우려면 농성 중인 자신들을 모두 죽이고 지으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무곡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분타주의 집무실 앞에서도 연일 농성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전 무림천자성의 마차에 치어 죽은 두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의 요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죽은 소녀들에 대하여 무림천자성주의 공식적인 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분타 지위 협정서가 너무 불공평하게 만들어졌으니 동등한 입장에서 다시 만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분타주의 생각은 단호하였다.
하늘같은 성주에게 감히 사과를 요구하는 자들은 능지처참으로 다스려도 부족하나 선무곡이 지금까지 우호적인 문파였기에 참는다는 것이다.
분타 지위 협정서 건도 마찬가지였다.
자구(字句) 하나, 점 하나 조차 절대로 바꿀 수 없다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은 참지만 성질 나면 모두 쓸어버리는 수도 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회옥은 자신과 부친이 무림천자성에 대해서 정말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이회옥은 선무곡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선무곡의 신임 곡주를 선출하기 직전인지라 여러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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