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07

이름에 얽힌 비밀 (2)

등록 2003.04.16 13:14수정 2003.04.1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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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술자리에 나와 술을 따르라는 전갈을 받고 나간 그녀는 모친을 진맥하면서 은자를 요구하였던 의원을 보았다.

그는 색을 밝히기로 이름난 정의수호대원 하나와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한참 동안 술잔이 오고가더니 결국 둘은 대취하고 말았다. 이때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주고받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유난히도 색을 밝히는 정의수호대원은 선무곡을 순시하던 중 눈에 확 뜨이는 미녀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방조선(方嘲蟬)이라는 성명을 지닌 의원을 부른 것이다. 그는 분명 선무곡 최고의 세 의원인 삼의(三醫)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둘은 금동아(金 鴉)와 이중앙(李  )이었다.

삼의는 의술이 뛰어나다는 공통점 이외에 대단한 말재간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것이 어찌나 대단한지 사람들은 그들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어 줄 정도였다.

그런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출세에 눈이 멀어 무림천자성의 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온갖 근엄한 표정을 다 지으며 다니는 것이다.

삼의가 주로 하는 일은 정의수호대원들의 욕정을 해결해주는 채홍사(採紅使)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뛰어난 의술과 언변 등을 총동원하여 선무곡의 어여쁜 꽃들이 무참하게 짓밟히도록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그 대가로 신분을 보장받고, 적지 않은 명성과 은자까지 챙겼다.

그들은 정의수호대원이 마음에 들어하는 여인을 찍으면 가장 먼저 주변 사람 가운데 환자가 있는가를 살폈다. 있으면 작은 병이라도 일부러 키워 중병으로 만들었다.


만일 환자가 없다면 가장 영향력이 클만한 사람을 찾아 은밀하게 독을 풀거나 독문 수법으로 혈도를 점혈(點穴) 하였다.

주로 여인의 부모가 그 대상이다. 아주 드물게 남편이거나 아이일 때도 있었다. 임자 있는 유부녀를 찍었을 때였다.

아무튼 삼의가 손을 쓰면 백이면 백 모두가 발병(發病)되었다.

제법 가산이 넉넉하였다 하더라도 이때부터는 가세(家勢)가 기울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도록 적절히 손을 쓰기 때문이다.

처음엔 가까운 곳에 있는 의원을 부르나 그들의 능력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결국엔 선무곡 최고의 의원인 삼의 가운데 하나를 부르게 되어 있다. 이때는 이미 병이 중할 대로 중해진 상황이 된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조작한 것이다.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진맥한 방조선이나 금동아, 이중앙은 치료비로 엄청난 액수를 요구한다. 물론 빨리 치료를 하지 않으면 며칠 내로 죽는다는 엄포를 잊지 않는다.

급한 마음이 된 여인은 은자를 빌리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은자를 빌릴 수 없다.

그렇게 되도록 손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엔 왜문이나 유대문에서 설치한 전장에서 은자를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이자 때문에 신세를 망치게 된다.

물론 그 장본인은 애초에 그 여인을 찍었던 정의수호대원이다.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싫증나기 마련이다.

그게 사내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선무분타의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여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은자들 빌려준 왜문이나 유대문의 전장들은 사실 무림천자성의 것이다. 천하의 정의를 수호한다 자처하면서 드러내놓고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것이 껄끄러워 그렇게 위장한 것뿐이다.

삼의는 치료비로 받은 은자 가운데 반을 무림천자성에 뇌물로 바친다. 나머지 반만으로도 호의호식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정의수호대원들로서는 원하던 여인을 품을 수 있어 좋고 한 건이 성사 될 때마다 용돈이 생기니 그야말로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셈이었으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여인의 길고 긴 이야기를 들은 이회옥은 내심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어찌 정의를 수호한다면서 뒷구멍으로 이토록 악랄하고 더러운 수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신세 한탄하는 여인을 뒤로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던 이회옥은 전전반측(輾轉反側 :이 생각 저 생각에 잠 못 이뤄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을 거듭하다 새벽녘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사람들이 없는 산 속에 가서 큰 소리라도 질러야 마음 속에 답답한 것이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쁜 놈들…! 인면수심(人面獸心)인 게야. 안 그러고는 그럴 수 없지. 아버지! 아버지가 잘못 아신 겁니다. 젠장! 무림천자성의 순찰이 되었다고 좋아했건만… 제기랄! 귀를 씻어야 해. 암! 씻어야 하고 말고… 젠장!"

고요에 잠긴 저잣거리를 벗어난 이회옥은 문득 요(堯)임금 시절 허유(許由)의 일화가 떠오르자 귀를 씻을 생각에 며칠 전 산책하던 중 보았던 계류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역사상 가장 성군으로 꼽히는 요(堯) 임금은 자기의 뒤를 이을 인물을 찾던 중 허유(許由)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란 것을 알고는 기산(箕山)에 숨어사는 그의 모옥으로 찾아갔다.

"잘 지냈소? 이런 외딴 곳에 살면서 불편하지는 않았소? 하기야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 또한 뜻깊은 일일 것이오."
"나랏일이 바쁠 텐데 어찌 이 먼 곳까지 찾아 오셨소이까?"

허유의 무뚝뚝한 대꾸에도 불구하고 요 임금은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일찍부터 높은 이름을 들어왔으나 이렇게 늦게 찾아오게 되니 오히려 미안하오. 과인은 이미 늙고 또 힘이 없어 모든 것이 부족하니 선생께서 천하를 맡아주셨으면 하오."

이 말을 들은 허유는 요임금을 남겨두고는 멀리 영수(穎水)라는 개울가로 가서 급히 귀를 씻었다. 마침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그곳에 왔던 소부(巢父)가 이 광경을 보고 의아해 물었다.

"아니, 갑자기 귀는 왜 그렇게 요란하게 씻고있는가? 귀에 무엇이라도 들어갔단 말인가?”

소부도 속세를 등지고 깊은 산중에 오두막을 짓고 숨어사는 현자였다. 허유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소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뭐라구? 그 더러운 귀를 닦은 더러운 물을 하마터면 우리 소에게 먹일 뻔했지 않는가."

그리고는 소를 끌고 부랴부랴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회옥은 허유나 소부처럼 귀만 씻으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저잣거리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날이 밝지 않은 신 새벽이기에 별빛만 총총할 뿐이었다. 아직 완연한 봄이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겠기에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훨씬 북쪽에 자리 잡은 대흥안령산맥에서 보낸 이회옥에게 있어 그것은 추위도 아니었다.

지난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의 싱그러운 내음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기분은 착잡했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다소 위안을 받은 이회옥은 저도 모르게 나직한 휘파람을 불었다.

오래 전 태극목장에서 망아지를 풀어놓고 팔베개를 한 채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보면서 풀피리로 불던 바로 그 선율이었다.

휘위익! 휘이이이익! 휙휙! 휘이이이익!
"이보게 젊은이!"
"앗! 누, 누구…? 누구십니까?"

아무런 경계 없이 구비를 돌던 이회옥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누군가가 암습을 하였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그런 상황이었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허허! 놀라기는… 누가 보면 죄 짓고 도망 다니는 사람인 줄 알겠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게. 그나저나 자네, 나 좀 보세."
"휴우…! 노, 노인장은 누, 누구십니까?"

여명이 밝지 않았기만 이회옥은 나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온통 백발인 머리카락과 신선의 그것과 같은 백염(白髥), 그리고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주름진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광만은 너무도 형형하였다.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현묘해 보였고, 어찌 보면 마치 광인(狂人)의 그것처럼 번뜩였다.

"허허! 노부가 누구인지는 와서 이야기해 보면 알 것이네."
"저어, 혹시 소생을 아십니까? 저는 노인장을 처음 뵙는데…"

"허허! 얼굴이야 오늘 처음 보지. 하지만 노부는 자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네. 여기서 자네를 기다린 게 벌써 한 시진이라네."
"예에…?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허허! 궁금한가? 그렇다면 이리 와서 앉아 보게."
"예? 예!"

이회옥은 노인이 자신에게 해코지할 의사가 없다 생각되었기에 스스럼없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자네는 자네의 뿌리가 어디인줄 아는가?"
"예? 뿌리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의 조상이 누구인지 아느냐는 말이네."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자네의 부친, 아니 이젠 선친이 되었겠군. 자네의 선친의 성명은 분명히 이정기(李正己)였을 것이네. 맞는가?"
"예에? 그걸 어떻게…?"

"그렇다면 자네의 성명 석 자는 이회옥(李懷玉)이겠군. 맞지?"
"허억!"

이회옥은 선친과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너무도 정확하게 맞추자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으면서 등에서는 식은땀이 솟았다. 가만히 있다가 화살에 꿰뚫리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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