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안에 빛나는 보석을 넌 알고 있었을까?

나로도 바닷가로 다녀온 봄 소풍 이야기

등록 2003.04.17 05:27수정 2003.04.1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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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반지락을 캐는 할머니와 선영이

반지락을 캐는 할머니와 선영이 ⓒ 안준철

전남 고흥군 나로도 바닷가로 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소풍날짜를 받아놓고 열흘도 넘게 잠을 설치곤 했던 까마득한 옛 시절의 습관이 다시 되살아난 것인지 새벽녘에 잠이 깨어 다시 눈을 붙이려고 해도 통 잠이 오지 않아 하릴없이 문학동호인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오늘 나로도 바닷가로 봄 소풍을 갑니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며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고,
4월의 햇살과 바람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맛보게 해주려구요.
함께 쑥을 캐는 시간도 마련했습니다.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흙을 만지고 들판에 지천으로 돋아난
쑥을 캐면서 무언가 마음으로 느끼기도 하겠지요.

자연을 접하지 못하고 공부의 기계가 되어 가는 아이들이
갈수록 감성을 잃고, 돈으로 행복을 사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아이들이 자연을 가까이 하도록 배려해주지도 않으면서
요즘 애들의 인간성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생각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말하기는 좋아하면서
생각을 키워줄 생각은 안 하는 것도 그렇지요.

a 바다를 거닐다가 잠깐 포즈를 취한 윤성이

바다를 거닐다가 잠깐 포즈를 취한 윤성이 ⓒ 안준철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지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요.
제주도의 4월은 그야말로 유채꽃 낙원이었어요.
자연이 뿜어내는 향기와 빛깔이 얼마나 찬란하던지
맑은 햇살과 바람과 유채꽃과 옥빛 바다에 흠뻑 취했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거예요.
버스에서는 잠을 자거나 멍하게 앉아 있다가
관광기사가 안내하는 목적지가 나오면 얼른 차에서 내려
구경을 하고 와서는 재미없다는 말뿐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소풍 전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이번 소풍의 목적은 햇살이다, 바람이다, 흙이다, 파도소리다.
목적지는 나로도 바닷가가 아니라 우리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이다.
그곳에서 이미 신이 주신, 이미 우리에게 있는 행복을 만나는 일이다.
삶을 향유할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a 쑥을 캐는 미라와  미숙, 그리고 종미

쑥을 캐는 미라와 미숙, 그리고 종미 ⓒ 안준철

삶을 향유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학교에서 해야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아이들로 하여금 삶을 향유할 수 있도록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그런 능력은 자연히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입시교육으로 감성이 메말라 버린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무엇으로 자신을 즐겁게 할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공항 대합실에서 화투(고스톱)를 치다가 직원들에게 야단을 맞거나 외국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보도가 그것을 입증해주고 있기도 하지요. 세계 양주 소비량 1위의 불명예도 그렇구요.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수학여행을 2학년 가을에 갔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가을이 되어야 우리의 산천이 붉은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던 것이 2학년 봄으로, 다시 1학년 가을로, 결국에는 더 이상 갈 데 없는 1학년 봄까지 수학여행 날짜가 곤두박질을 쳤지요. 일찍 다녀와서 마음잡고 대학입시를 준비하게 하자는 발상이었겠지요. 그런 조급함과 단세포적인 발상이 문제지요.


a 쑥을 뜯다 말고 풀잎과 대화라도 나누는 것일까?

쑥을 뜯다 말고 풀잎과 대화라도 나누는 것일까? ⓒ 안준철

우리는 바다에 닿기 전에 고흥군 포두면 어느 한적한 곳에 차를 대고 들판에서 쑥을 캤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은이와 선영이는 따라오지 않고 먼발치로에서 쑥을 캐는 아이들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개구리를 무서워하든지 싫어하든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담임의 등살에 어쩔 수 없이 쑥을 캘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지요. 풀숲에 숨어 있던 개구리가 폴짝 튀어 나올까봐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말입니다.

지은이는 그날이 바로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이지요. 여느 아이들 같으면 생일 아침에 시를 써서 선물해주었을 터인데 아름다운 바다로 소풍을 다녀온 뒤에 시를 써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동안 지은이와 주고받은 메일만으로도 시가 될만한 것들이 충분했지만 깜짝 놀랄 정도로 성숙한 사유와 탁월한 문장력에 실려 나온 내밀한 사연들이 시가 되는 것을 지은이는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눈에 물기가 있으면 눈이 더 반짝이는 법이야'


a 손에 가득한 검은 보석(왼편이 지은이 손)

손에 가득한 검은 보석(왼편이 지은이 손) ⓒ 안준철

지은이 눈이 빛난 것은 우리 버스가 바다에 닿고 난 뒤부터였습니다. 그날 운이 좋게도 바다에 물이 많이 빠져 흙모래 속에 숨어 있는 반지락을 캐는 바닷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개구리 때문에 쑥을 캐는 일에 재미를 못 본 지은이와 선영이는 그 한을 풀기라고 하듯 반지락을 캐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제게 내민 손바닥에는 바다의 보석인 검은 생명들이 가득했습니다. 시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지요.


네 안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


한 시절 피었다가 스러지는
들판에 핀 화사한 들꽃보다는
검은 흙모래 속에서
오랜 세월 숨어 있다가
누군가의 호미 끝에 찍혀 나와
그의 양식이 되어 주고
그의 피와 살이 되어주는
반지락 같은 사람

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풀숲에서 개구리가 튀어 나올까봐
아이들과 어울려 쑥도 캐지 못하고
먼발치로만 서성이던 네가
바닷바람에 검게 그을린
할머니의 호미 끝에 찍혀 나온
검은 반지락을 보자
눈이 번쩍 빛난 것을 보면

너에게서 온 첫 메일을 읽던
그날의 내 눈빛도 그렇게 빛이 났을 거야
흙 속에 감추어진 진주를 발견한
그런 오진 기쁨 같은 거
눈에 물기가 있으면
눈이 더 반짝이는 법이지

너의 사연을 시로 쓰지는 말아달라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너와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싶었지만
시가 될만한 추억 하나 만들고 싶었지만
넌 오래 오래 반지락만 캐고 있었어
마치 보석 찾기라도 하듯이

아, 네 안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을
너는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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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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