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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신랑이랑 대판 싸웠어요. 애기 모유를 먹이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옆에서 이것저것 좀 챙겨줬음 싶은데 바로 옆방에 있던 신랑을 20분쯤 불렀을 거여요. 못 들었다길래 문 좀 열어놓고 있으면 안되냐고 따졌지요. 몸이 아프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져요. 너무 몰라주고 자기 시간만 보내려드는 남편도 야속하구요."
출산한 지 이제 3주, 친정엄마는 몸이 안 좋으시고 시어머니는 멀리 계시다. 지난 2주간 전문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산후조리를 맡겼던 초보엄마 지혜선씨(31). 남산만한 배를 안고도 다큐멘터리 외주 프로덕션에서 서브 작가로 일했다. 월간지 자유기고 활동과 1주일에 1번 과외지도를 병행하면서.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과 일하려고 사는 사람으로 구분한다면 혜선씨는 후자에 속한다. 임신하고 잠깐 쉬다가 '우울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다시 일을 해야만 했던 사람이니 말이다.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3년 반 동안 경제지 기자로 일했다. "자동차 관련 취재를 주로 했는데 정부와 대기업 상대로 고발성 기사라도 쓸라치면 데스크의 제재가 따랐죠. 광고주 눈치를 봐가며 해야 하는 현실도 싫었어요."
그 무렵 선배의 제의로 지금은 탄탄해진 모 벤처기업 창립멤버가 되었다. 그간의 인맥형성과 사람 설득엔 한 능력 발휘하는 특유의 자신감으로 내외홍보와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그가 진행한 사업설명회로 회사가 정통부와 문광부에서 상을 받은 일도 있다.
중견급 관리자로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업계를 주름잡던 그였지만 결혼을 전후해 사회진출에서 여성이 갖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살리자'는 생각과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는, 보다 안정적인 일을 찾아 2002년 1월부터 구성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글로 다시 시작하게 됐으나 같은 연배라면 이미 메인 작가 급인 나이 먹은 현실, 그리고 신문사 기자 출신이라는 전력 때문에 처음엔 어려웠다. 5,60대 선배작가들이 활동 중이고 '알아서 자기 밥그릇 챙겨야 하는' 프리랜서 세계에서 신문사 선후배간의 유대감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방송사의 컨펌(외주제작 확정)을 따내기 위한 기획서 만들기가 그의 주업무였다.
셀프 개념은 아이(I)와 미(me)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통한 것이라는데, 그의 자아 개념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인도에 떨어져도 혼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인간'. "남들보다 늦게, 그러나 그만큼 이제 막 맹렬하게 달려가야 할 시기에 임신을 하고 애를 낳고…, 시간적으로 너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답답하죠. 한마디로."
한달 후로 계획하고 있던 업무복귀가 과연 가능할지가 걱정이다. 아이를 맡아주시기로 했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안되겠다고 하셨고, 사실 그것 때문에 신랑한테 더 신경질을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신성한 줄 몰라서가 아니라, 자기 배 아파 난 갓난애가 귀엽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는 그저 일이 하고 싶을 뿐이다.
"5년후엔 메인 작가로 일하고 있겠지요. 안주하지 않을 거여요. 다방면으로 많이 건드리면서 일욕심 많은 여자로, 엄마로 살고 싶어요."
주변을 둘러봐야 변변한 탁아 시설도, 제도적 뒷받침도 없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나 또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 없으면 못 사는 초보엄마가 겪는 답답증을 단순히 개인적인 성격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아기 기저귀를 한 보따리 걷어 개면서 그가 말했다. "그나마 전 아직은,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도 있잖아요. 애키우고 집안일하는 것을 이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전업주부는 또 얼마나 많아요. 대학졸업장이 있어봐야 슈퍼마켓 계산원밖에 할 게 없다는 엄마들도 많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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