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의 교훈

즐거운 고딩일기

등록 2003.04.18 23:58수정 2003.04.2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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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죄송합니다.”


우리 반 담임을 맡고 계신 유용재 선생님이 전산실에 홀로 계신 것을 보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침묵)”

“선생님 제가 이렇게 온 이유는 말이죠, 지금 야자 그만두고 집에 보내 달라는 소리가 아니라요,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제야 담임선생님께서는 굳은 표정을 점점 누그러뜨리시며 한 말씀 하신다.

“그래,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냐?”


20여분쯤 전인 종례시간.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내일까지 국사수행평가 숙제를 제출해야 한다.

내일은 금요일. 일주일중 단 한번 들어있는 국사시간이 있는 날이다. 그 국사시간에 우리는 중간고사를 앞둔 터라, 국사선생님이 요구하시는 수행평가 숙제를 내야한다.


사실, 숙제 이야기가 공식 언급된 때는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주제는 우리가 현재 배우고 있는 격동의 근대사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를테면, ‘독도영유권 분쟁에 대해서 그 역사적 배경과 역사의 흐름에 따른 영유권 분쟁 양상 등을 조사한 후 자신의 의견을 쓰시오’, ‘흥선 대원군에 대해서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하시오’, ‘외규장각 도서반환 문제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과 주요한 내용과 더불어, 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쓰시오’등등.

우리 반의 우등생이자 반장인 동한이. 벌써 숙제를 반 이상이나 해 놓았단다.

대략적인 과제의 난이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몇몇 아이들은 동한이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숙제 어렵디? 하는데 몇 시간 걸렸냐?”, “글쎄……. 내 경우에는 어림잡아 세 시간 정도?” “세 시간?!”

동한이의 다소 충격적이라 할 발언에 오늘의 야자(야간자율 학습)공부는 불가(不可)하다는 여론이 떠오른다.

“동한이가 세 시간 걸렸는데 어쩌라고. 야자 절대 못 해.”

이런 혼란한 와중에 담임선생님께서 종례를 위해 들어오셨다. 내 뒷자리에 있던 현수는 대뜸, “선생님, 오늘 야자 못하겠는데요.” 선생님이 미처 대답하시기도 전에 반 전체는 이에 절대 동조한다는 양 술렁이기 시작한다.

담임선생님 왈 “그건 너희들 사정이지, 그리고 주말에는 숙제 안하고 무얼 했냐?”

이런 선생님 말씀에 나는 “주말에 도서관 가서 공부해야지, 고삼이 따로 시간 내서 숙제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웃음)”

반 인원 전체는 이제 이른바 ‘야자절대 불가’의 의사를 담임선생님께 관철시키기 위해서 일치단결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처음에 우리의 의견을 반장난 식으로나마 받아주시던 담임선생님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안돼. 이런 식으로 빠지면 야자, 유지할 수가 없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이 말씀에 교실은 일순간 썰렁해지고, 담임선생님과 3학년 8반 전체가 긴박한 갈등상황에 놓여지게 되었다.

잠시 후 담임선생님은 일단 청소는 해야 할 것 아니냐면서 청소당번들에게 청소를 지시하신 후 절대 안 된다는 말씀을 남기시고는, 홀연히 반을 빠져나가신다.

“아, 그럼 숙제를 하란 거야 모야”, “이씨, 죽었다. 야자하면 숙제 언제 해서 내냐?”

나는 나름대로 이 상황을 분석해 보고자 곰곰이 생각을 했다.
나 역시도 숙제는 아직 안 했다. 반 친구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노선을 나는 견지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나를 옹호함으로서 집에 보내달라는 말을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기에는 명분이 거의 없다.

사실인 즉, 토요일 날 나는 말로만 공부를 했지, 실제로는 그날 스스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에서 쉬고 말았다. 전화도 끊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잠만 잔 것이다.(일요일 날 만큼은 도서관에 갔을지언정.)

한마디로 내가 잘못한 것이 명백했다. 다른 친구들의 경우까지 내가 겪어보지 못한 바라, 함부로 이야기할 순 없지만…….

그러한 사정은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주말에 도서관이 어쩌고저쩌고 해서, 야자를 못하겠다고 떼를 쓴 것이었다.

나는 순간 스스로 반성하고 싶었고, 담임선생님께 용서를 빌고 싶었다. 죄송하다고.

“아까 제가 드린 말씀 거짓말입니다. 실은 토요일 날 집에서 놀았거든요. 전적으로 잘못은 저 자신에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그리고 우리 잘못이에요. 조금 웃기는 말이지만 토요일 일요일 날 시간 활용 못하고 야자시간 빼달라고 우기는 것도 억지스럽고요…….”

나는 솔직한 내 심정을 담임선생님께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2학년 때 숙제하던 버릇을 3학년 때 와서 하려니까 시간조정의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씀 드렸다.

“시간활용 잘 해야 한다. 그리고 아까도 말 했지만, 야자를 이런 식으로 운영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돼. 알겠냐?”

담임선생님은 이어서 ‘원칙’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사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 약속이라는 것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긴다. 원칙이 깨진다면, 상호간의 존중이나 일련의 관계는 존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오늘의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 비록 내일의 상황이 절박하지만 우리가 사전에 상호 약속했었던 야자. 그것의 존립도 ‘원칙’이라는 것이 지켜져야만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담임선생님께서는 끝내 우리의 야자불가 의견을 일축하셨다. 숙제할 길이 막막하다. 그렇지만 기분은 후련했다. 비록 그것이 우리 반 다수의 입장과 반(反)하는 행동일지도 모를지언정.

그건 그렇고 이번 일뿐만이 아니라, 요즈음에는 종종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의 태도가 다소 강건하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담임선생님께서 그렇게 야자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 자체도 우리가 어차피 공부해야만 하는 현실을 잊지 않게 하시려 함이 아니었을까. 즉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의 발로로서 그리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원칙’이라는 매우 중요한 ‘대명제’를 간과했었다는 것.

방식에 있어서 다소 마찰과 긴장이 있긴 했지만, 오늘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려 했던 교훈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후기]

이러한, 많은 갈등과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담임선생님과 우리는 결국 반반씩 양보하여 절충안을 내놓게 된다.

내가 전산실을 다녀가고 동한이가 전산실을 다녀오고 나서 담임선생님이 오셨다.

오랜 침묵 끝에 하신 말씀. “너희들이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우리는 이 말의 해석 문제를 놓고 씨름했지만 반장 동한이의 해설로 이것이 절충안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선 야자를 하긴 했다. 8시까지만.

비록 서로의 입장의 반쪽짜리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원칙’이라는 대의명분과 ‘국사 숙제’라는 실리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다소 강건한 입장을 취하시긴 하셨어도 담임선생님은 내일 바로 닥친 국사숙제와 그 수행평가 점수를 걱정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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