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루쉰 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 기념석. "중국의 백만대군이 못할 일을 한국의 한 젊은이가 했다"고 장개석 주석이 격찬했다.박도
옛 글에 “집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 라 한즉, 국난을 당하여 유림의 가문으로 항일 독립 전선에 삼대가 몸 바쳐 끝까지 일제와 맞서 싸우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온 석주 선생 일가의 투쟁사를 보면서 그 거룩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또 사돈 집안도 일제 때 의병 활동으로 쟁쟁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 가문이요,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또한 인척이었다. 내 견문이 얕은 바로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몇 안 되는 항일 명문 집안이다.
글쓴이로서 이런 가문을 배경으로 삼는 일은 대단히 의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순간 나는 욕심을 갖다가 지레 포기한 것은, 우선 내가 아는 게 너무 적을뿐더러 과연 이런 글을 쓸 만큼 평소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였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에 부끄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삼대 유고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아쉬움이 많았고, 독립 운동사에도 까막눈인 데다가 글의 배경이 되는 만주 일대가 나로서는 얘기로만 전해 듣던 전설 속의 세상이기에 내 욕심을 접었다.
그런 중, 행촌문화원 이영기(李英基) 이사장님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셔서 내 분수도 잊은 채 덥석 항일 유적지 답사 길에 올랐다.
이번 답사는 나 개인으로 너무나 과분한 영광이었다. 이항증 선생과 중국 대륙을 누비며 무장 투쟁을 하다가 조국 광복 제단에다 목숨을 바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 손자 김중생 선생과 동행하면서 그분들의 알뜰한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