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식 연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전직 대통령들. 반대자들에게 이 이상(!) 더 어떻게 "손을 내밀며 협력을 요청"해야 하는가?주간사진공동취재단
이런 취지의 발언은 취임식 때부터 이미 여러 번 나온 말(노 대통령은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취임식에 전두환·노태우 두 범죄자까지 초청하여 손을 내민 바 있다)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기자는 이 말이 유 기자의 귀에 난마처럼 얽혀 있는 한국정치의 어려움을 풀기 위한 묘안으로 들렸다는 사실이 어리벙벙할 뿐이다. 한국에서(아니 전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개혁이 언제나 어려움을 겪는 것이 반대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서, 협력의 요청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대한민국에는 하나의 신성불가침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국민'! 이데올로기다. 국민이라는 용어는 모든 사회과학적 분석을 무용케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국민의 정체가 뭔가? 국민통합의 정체가 뭔가? 국민이란 하나의 추상이다. 그곳에 분명히 공익의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공익도 계층간의 끊임없는 대립을 통해서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대립과 투쟁 없는 국민통합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기자는 "국민대통합의 길"을 마치 무슨 신성한 구도자의 길쯤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런 다음 대통령의 자리를 바로 이 대립과 투쟁 없는 신의 자리로 밀어내려 하고 있다. 보수언론의 전략을 유 기자가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실제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고 믿었던 전임 김대중 대통령도 바로 이러한 '국민 이데올로기'에 갇혀 정치개혁을 망쳤는데 노 대통령도 똑같은 방식으로 망치라고 권하고 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왜 수구언론들이 시도 때도 없이 국민을 부르짖고, 통합을 외치며, 대통령을 '국민의 대통령'으로 밀어올리려 하는지!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극우 파시스트까지를 국민의 이름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과거 자신들이 지지했던 파쇼정권에서는 민주세력은 국민 축에 끼워주지도 않았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모두가 국민을 부르짖지만 실제는 국민의 이름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유 기자는 이러한 정치메커니즘을 무시하고 '립 서비스'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국민 이데올로기를 믿자고 순진한 제안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반대자들에 대해 "자신들을 보는 대통령의 시선이 어떤 것임을 감지한 이들을,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려 하였고, 장차 비토세력으로 자리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염려한다. 유 기자에게 묻는다. 언제 그들이 개혁에 대하여 비토세력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는가!? 이제 다시 개혁에 동참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그들의 선택일 뿐이다.
유 기자는 자신의 발언을 추스르기 위하여 "이것은 개혁을 포기하며 반대자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주문이 아니다. 개혁을 추진하되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참여정신을 가질 수 있는 내용과 방식의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주문하고 있다. 얼마나 트집잡힐 일없는 무난한 멘트인가? '반대자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서도, 그들에게서 공감을 얻어, 그들이 싫어하는 개혁을 국민의 이름으로 참여시켜 성공시킬 방법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요는 이것이다. 노 대통령의 문제는 (언론과의 말씨름이 아니라) 개혁을 열망하는 기존의 지지층을 잃어가는 정책(또는 정책부재)을 시행하면서 개혁에 소극적인 새로운 지지층의 확산을 위하여 (지역구도적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개혁이 실패해가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실패는 후보시절 '김영삼 시계'사건 정도로 충분히 교훈을 얻지 않았는가? 이것은 취임 며칠이 지났느냐는 식으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단언한다. 지금 돌이키지 못하면 앞으로 기회는 없다. 정치학자가 아니라도 모두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집권했다면 국민 이데올로기에 빠져 개혁을 열망하는 비토세력 걱정으로 날을 새고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노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링컨이 '국민통합'을 위해 내전을 회피했는가? 링컨의 '국민통합'은 승리한 뒤의 연설문에 나오는 말이었다. 부시의 정치가 비토세력 걱정하는 정치인가? 유럽의 좌파정당이 복지문제를 강조하다 집권하면 이제는 다른 방식(국민 이데올로기)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노동자 탄압에 들어가는가?
유 기자식의 정치에 따른다면 개혁세력은 집권하지 못하면 그래서 당하고, 집권하면 국민의 이름으로 반개혁세력 눈치보느라 날새고 어쨌거나 희망이 없는 셈이다. 이것이 개혁정치를 위한 유 기자의 제안인가? 유 기자는 "개혁과 통합의 병행만이 활로"라고 부제를 달아놨다. 기자는 사실상 개혁의 무장해제를 촉구하는 이 구호에 이렇게 대답하겠다. "개혁만이 (지역구도를 깨고) 통합을 여는 활로"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은 개혁세력에 있다. 그들을 잘 묶어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의 정치가로서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이지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눈치를 얼마나 잘 보느냐에 그의 정치적 운명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확고한 개혁의지가 '외연확장'을 가져오는 것이지 기회주의적인 외연확장이 개혁의 성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유 기자는 "시행착오들을 정돈하고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서 "'선의'에는 선의로 답하는 것이 우리네 인심"이라고 기사를 끝맺고 있다. "'선의'에는 선의"로? 그래서 이 나라 정치의 모습이 지금까지 이런 모습인가? "인심"을 들먹이는 유 기자는 정치를 무슨 도덕적 감정의 문제쯤으로 알고 있는가?
노 대통령도 이라크파병과 관련하여 국제관계의 정치가 명분만으로 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국내정치는 '국민 이데올로기'라는 명분만으로 가능한가? 국내정치나 국제정치나 본질은 같다. 명분이나 도덕보다는 현실의 이해관계의 끊임없는 충돌이다. 대통령이야말로 분명히 이 이해관계의 한쪽 편에 서 있는 힘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더 잘 반영하려고 대통령선거에 그렇게 열심히 참여한다. 노 대통령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팔기 위해 대통령에 출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신념을 설득하고, 실천하다, 성공하면 재집권하고, 실패하면 정권이 교체되는 것, 이것이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