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이 사준 술이 더 맛있수다게"

작은 농어촌 교회의 부활주일 풍경

등록 2003.04.21 06:15수정 2003.04.2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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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기독교의 대표적인 절기 중의 하나인 부활주일을 준비하면서 교우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지역주민들과 나누기로 했습니다.


부활주일 노인 분들을 초청해서 식사도 대접하고 여흥의 시간을 가지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우리 가정이 분담한 것은 청포묵과 식혜였습니다. 토요일 밤늦게까지 청포묵과 식혜를 만들고 청년들과 부활계란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부활주일 아침, 어린이 예배와 대예배를 마치고 노인정으로 가서 20여분의 노인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교인들이 분담해서 준비한 음식을 상에 차려 놓으니 근사한 잔칫상이 됩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적어볼까요? 솜국, 돼지족발, 잡채, 생선튀김, 호박전, 청포묵, 식혜, 샐러드, 감자떡, 송편, 수박, 귤….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식사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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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식사를 마치신 노인 분들은 입이 궁금하신지 얼른 교회마당으로 나가셔서 담배를 피우시며 여흥을 위한 준비를 하십니다. 윷놀이와 게이트볼을 준비해서 저를 포함한 교인들과 노인정 대표선수는 게이트볼을, 윷놀이는 예쁜 소녀를 자처하시는 권사님들과 노인정 할아버지들이 합니다. 그냥 하면 재미없다고 내기를 걸고 시합에 들어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팀은 5명중 단 한 명만 게이트볼을 친 경험이 있고, 저를 포함한 나머지는 오늘이 처녀출전입니다. 지는 팀에서 막걸리 한 박스를 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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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게이트볼 시합이 시작되었습니다.
1번 게이트도 통과를 못해서 매번 출발선인 저의 모습에 응원의 박수를 아끼지 않으신 덕에 네 번만에 1번 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이러니 시합이 될 리가 없죠. 결국 우리 팀이 계획했던 대로(?)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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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친선게임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 술안주가 될만한 것들을 바리바리 싸서 동네 어르신들을 노인정으로 모셔다 드립니다. 그리고 막걸리와 소주를 드실 만큼 넣어드리고 왔습니다.

해안초소에 있는 장병들에게도 가져다주려고 부활계란과 음식을 싸는데 회갑도 넘으시고 고희를 바라보시는 권사님들이 농을 하십니다.


"목사님, 이쁜 우리들이 가야 장병들이 우리 교회 나오지 않겠수꽈?"
"그럼 우리 교회 미스코리아 진 권사님이 가야겠네요. 아따 근데 진 권사님 보고 싶어 장병들이 교회 오면 손주들은 어쩔꺼?"

작은 농어촌 교회의 부활주일 풍경, 큰 교회처럼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교인들도 지역주민들도 모두 신나는 하루였습니다.

저녁에 노인정 회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거나한 목소리로 "목사님이 술 받아 주신게 더 맛있다고 난리우다"하십니다.
"예, 어버이날 또 받아 드릴게요."

부활주일 잘 지냈냐고 전화하신 어머님, 교회의 원로장로님이신 아버님께서 김 목사가 꽉 막히지 않았으면 동네 노인 분들 모셨을 때 약주대접을 했어야 하는데 걱정하셨답니다. '아버님도 별 걱정을....'하며 오랜만에 부전자전의 정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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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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