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시간을 벗어나 자연의 시간으로

제이 그리피스의 <시계 밖의 시간>

등록 2003.04.22 15:37수정 2003.04.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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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계의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미 없는 숫자(몇 시 몇 분, 몇 월 몇 일, 몇 년)가 삶을 지배합니다. 몇 분의 몇 초까지 샐 수 있는 시계가 촘촘히 짜여진 그물로 우리 삶을 죄어옵니다. 심지어 시계는 멀리 떨어진 외국 땅의 사람까지 통제합니다. 그리니치 표준시에 따라 통일된 시간은 세계를 하나의 시간틀로 묶었습니다.

불행히도 우리에겐 시간을 훔치는 회색도둑들과 싸워줄 모모도 없습니다. 자본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시간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없습니다. 그 옛날 제각기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가졌던 기억은 돌에 매달려 망각의 강속에 버려졌습니다. 그 버려진 기억을 건져내어 다시 깃발로 내건 사람이 있습니다. 제이 그리피스는 이 깃발을 여성주의(feminism)라는 깃대에 단단히 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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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피스는 시원하고 당당한 어투로 얘기합니다.

"시계는 시간의 동의어가 아니라 반의어이다.…현재의 시계는 시간의 실현이 아니라 배신이다"(36쪽).

누가 배신했을까요? 바로 모더니티라 불리는 근대의 정신입니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열차와 철도는 근대를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철도는 산허리를 자르고 구멍을 뚫으며 직선으로 내달렸습니다. 복잡하게 짜여진 철도노선은 전국의 모든 지방을 거미줄처럼 연결했고 시간을 통일했습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이동할 수 있으니 좋다구요? 글쎄요, 그리피스는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얘기합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타이타닉호는 무리하게 운항하다 침몰했고, 신속한 전화와 전보 덕분에 외교관들은 신중하게 생각할 여유를 잃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최후통첩시간까지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기에 '땡'하는 소리와 함께 미국과 영국의 전투기와 함대는 이라크 땅을 쑥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순간의 선택이 최악의 상황을 낳는 '빠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근대성은 가장 무분별하게 쪼개고 쪼개어진 시간만 알 뿐 사람이 중요해지고 시간 자체가 중요해지는 그런 시간은 전혀 모"(59쪽)릅니다.


그리피스는 '속도'라는 새로운 신을 비판합니다. 자본, 권력과 결탁한 속도는 인간의 삶, 생명의 삶을 짓밟았습니다. 서양의 달력과 시계가 동양을 짓밟고, '시간은 돈'이라는 노동규율이 자본의 배를 살찌웁니다.

"지주들이 평민들의 토지에 울타리를 쳤듯이, 새로운 시간소유자 자본가들은 이들 평민의 시간에 공장이라는 울타리를 쳤다"(311쪽).


사실 '신분상승', '추월', '과소비', '과식'같은 말들은 속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빠른 게 좋다구요? 그리피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빨리 이동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율성은 줄어들고, 안전을 위해 엄격한 외적인 법규와 교통시스템의 지시에 더욱더 의존해야 한다. 이렇듯 속도는 수동성을 키운다. 고속으로 달리는 개인은 도로에 지배당한다"(77쪽). "속도와 파시즘은 더럽고도 강철같은 결탁관계라 할 수 있다"(87쪽).

그리고 속도는 시간만이 아니라 공간도 지배합니다. 그 옛날 공간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시간은 자연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노동방식, 추수시기나 양털 깎는 계절, 이 모든 것이 농촌의 농사리듬과 함께 했다"(477쪽).

우리도 바위 하나, 강줄기 하나, 나무 하나까지 이름을 붙이고 생명을 가진 사물로 여겼습니다. 이젠 그렇게 부를 땅이나 자연이 남아있지 않습니다(있다면 돈을 내고 소비하는 상품이겠죠). 플라스틱과 콘크리트가 우리 공간을 채운 지 오래되었으니까요.

태양을 따르는 남성의 시간은 달을 따르는 여성의 시간을 더럽게 여겼습니다. 자연히 여성의 월경도 더러운 것으로 배척받았습니다.

"여성의 한 해는 음력이며 열세 달로 되어 있으며, 바로 이것이 동화 속에서 13이 저주의 숫자가 된 이유"(226쪽)라고 합니다(그래서 그리피스는 자신의 책을 일부러 13장으로 나눴습니다). 특히 남성의 시간은 여성의 출산을 지배했습니다. "출산은 달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산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시간은 또한 개개인의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최고의 의사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이 산부인과를 탈취한 이후 여성의 출산시간은 남성들의 강압적이고 공적인 시간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음력이 아닌 태양력을, 사적이고 내면적인 시계가 아닌 공적인 시계를 따를 것이 강요되었다"(231쪽). 남성의 시간은 출산이라는 위대한 창조행위를 모욕합니다.

그렇다고 그리피스가 남과 여의 대규모 전투를 계획하는 건 아닙니다.

"나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반드시 남자와 여자 각각의 성질이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논의의 확장을 위해 작동하는 문화적 기제일 뿐이다."(265쪽).

벨 훅스의 말처럼 여성주의는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지 반(反)남성주의가 아니니까요.

요즘 직선으로 그어진 남성의 시간은 인류의 미래를 암흑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그 대표주자가 유전공학입니다. 그리피스는 시간도둑질을 '인클로저'라고 부릅니다.

"유전공학은 곧 시간에 대한 인클로저이다. 공동의 유전자물질이라는 유산이 특허법률에 의해 '울타리'가 쳐지고, 판매 가능한 상품으로 제조되고 있다"(486쪽). "유전자은행은 사적 기업들에 의한 과거에 대한 울타리 치기라고 한다면, 유전학은 훨씬 더 잔인하게 미래에 대해 담을 쌓아올리고 있다"(492쪽).

게놈 프로젝트, 생명 복제가 모든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구요? 우리의 경험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우리는 이것을 경험하였다. 지주들은 인클로저를 통해서만이 인구를 먹여 살릴 새로운 영농법을 개발할 수 있다고, 인클로저는 사적 이익을 통해서 공동의 이익에 봉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다. 저 인클로저의 지주들이 오늘날 몬샌토사의 주주들이다"(487쪽).

그리피스는 시계시간이 몰아냈던 삶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시계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었던 섹스, 마약, 로큰롤 같은 것을 얘기합니다. 아마도 그리피스의 관심은 섹스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섹스는 늘 시계를 모욕하면서 야성의 시간의 길동무가 되고자 한다.…섹스와 시계는 서로를 증오한다. 신데렐라와 왕자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사랑에 찬물을 끼얹은 것도 자정을 알리는 시계소리 아니던가"(556쪽). "섹스는 각 세대가 서로 뒹굴며 새로운 방식으로 유전자를 뒤섞는 것을 의미하며, 섹스는 탄생의 가능성을 배가해 나가며 생물종으로 하여금 유전자 저수지를 고갈시키지 않게 하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다"(504쪽).

섹스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조금 시원찮은 대답인 것 같습니다.

또 아쉬움이 남는 건 '진보'를 바라보는 그리피스의 시선입니다. 그리피스는 진보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건 남성적인 직선의 진보였으니까요.

"진보는 마르크스주의 세계관과 극우 신자유주의의 다국적 기업 및 시장자유주의자들 모두가 동조하는 유일한 이데올로기이다"(372쪽).

그런데 서구의 경험이 그럴 수 있지만 진보는 제3세계, 주변부에서 새로운 내용과 경험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보의 완전한 폐기가 아니라 새로운 진보인 것 같습니다.

시계 밖의 시간

제이 그리피스 지음, 박은주 옮김,
당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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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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