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 가고야 말았다

등록 2003.04.22 22:06

수정 2003.04.2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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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에 끝발 날리지 않은 사람 없겠지만, 필자도 소싯적엔 성적표에 수수수가 연달아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유독 미술만큼은 '수'를 받지 못했다. 아니 미술의 경우 우수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었다. 5, 6학년이 되어서는 아예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면 꾀병을 부리고, 그도 안 되면 학교가다 삼천포로 빠지는 등, 이 핑계 저 핑계로 학교를 빼먹기 일쑤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미술 혐오증이 있었지 않나 싶다.

이런 증세는 성장하고도 호전의 기미가 보이기는 커녕 피카소니, 백남준이니 하는 미술 앞에 '현대'자가 붙은 것들을 접하자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국립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머리 아프지 않겠는가.

국립현대미술관.
그 곳을 몇달동안 벼르고 벼르다 겨우 다녀왔다. 중학교 시절 소풍으로 갔다가 현관 입구에서 출석만 체크하고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가 나와버린,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며 "어, 가는 길은 꽤 이쁘군" 하고 말았던 그 국립현대미술관을 말이다.

이번 호에는 어떻게 너무 저속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으면서, 최대한 저렴한 가격의 메뉴들로 필자가 만드는 주간지의 '문화단신' 란을 채울까 궁리하고 인테넷을 검색하던 중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중국현대목판화 : 혁명에서 개방까지>를 전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불현듯 '목판화'라는 단어와 '혁명'이라는 단어 사이에 몇 장의 목판화가 떠올랐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김지하의 <황토>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양성우의 <겨울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어느 순간 필자의 소장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풀빛 시선집의 맨 앞장은 언제나 목판화로 시작되었고 또 김남주의 <나의칼 나의피> 겉 표지도 목판화였다. 그리고 이런 목판화들은 문청시절(자세히 말해 문학을 빙자한 청소년 방황기)에 그 시편들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 저곳에 가면 그 목판화의 원조들을 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발길을 평생 멀리 하리라 했던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끌었다.

여타의 중국현대문예가 그렇듯 목판화도 루쉰과 마우쩌둥의 영향 아래 있었다. 목판화가 창작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 루쉰의 '창작판화운동'부터이며 마우쩌둥의 '연안강화'를 통해 양식이 자리잡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현대목판화>는 미술의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가치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았던 중국 목판화가들의 예술적 투쟁의 기록"이란 리플렛의 설명처럼 필자가 보았던 80년대 목판화들보다는 훨씬 다양했으며 그만큼 전시는 혼란스러웠다.

80년대 우리 목판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보는 순간 "붉은 수수밭"이라는 말이 내뱉어지는 차오매이의 <북방의 9월>, 70년대 반공 포스터와 북쪽의 포스터를 연상케 하는 예한의 작품들과 <아Q정전>의 그림 동화 쯤 되는 자오옌니안의 작품 등 중국의 목판화는 그 대륙의 넓이 만큼이나 사실적이고 선동적인 것에서부터 실험적이고 추상적인데 까지 그 폭을 넓게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거듭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그 것들은 한 입에 우겨넣으니 어찌 과식,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고 어찌 혼란스럽지 않았겠는가.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을 나오면서 여전히 뜻 모를 조각품들 사이를 거닐며, 어쩌면 필자가 보고 싶었던 것, 그리웠던 것은 무모하리만치 단순명료하면서도 치열했던 객기어린 시절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80년대 그와 같은 미술과 문학, 시와 목판화의 행복한 만남과 충격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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