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래기 죽 먹는 게 자랑이냐?"

<어릴 적 허기 달래주었던 음식 1>싸래기죽, 칡뿌리, 개밥나무열매

등록 2003.04.23 19:22수정 2003.04.2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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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래기죽


"오빠~. 오빠~~"
"왜?"
"싸래기죽 먹어…."
"뭐?"
"싸래기죽 먹으라니까!"
"알았어잇!"

여자아이는 동네가 떠나갈 듯 '또랑'까지 가서 오빠를 소리질러 불렀다. 부르는 소리가 하도커서 이웃집과 자기네 집에서도 들렸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여자아이는 곧 바로 엄마에게 불려가 심한 꾸중을 들었다.

"호랭이 물어갈 년아, 남 챙피허게 소릴 지르고 난리여!"
"…."
"가시내야, 죽 먹는 게 자랑이냐?"
"…."

장수군(長水郡) 깊은 산골 이른 해 지던 겨울 '싸내기' 내리던 날. '싸라기'로 '싸래기죽'을 양껏 쑤었다. 점심 때 간식으로 가끔 먹는 건 그렇다 쳐도 이 댁에선 허구헌날 긴 겨울을 싸래기 죽을 쒀 먹었다. 쌀눈이 따로 떨어진 것이니 영양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뉘'를 골라내고 한두 번 씻어 물 가득 붓고 서서히 끓이면 양이 밥보다 두 배는 늘어나는 게 '싸래기죽'이다.

벼 도정시설과 건조 시설 미비로 쌀 열 가마 찧으면 한 가마는 싸라기가 나오던 때다. 사람 먹을 것도 턱없이 부족한 터에 소에게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집은 지역 갑부 소리를 들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죽으로 먹어 치우고 있었다. 원체 소문난 구두쇠 할아버지가 떡 버티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양푼에 가득 퍼서 김치 한 그릇 놓고, 파 숭숭 썰어 넣고 참깨 빻아 넣은 양념간장을 듬뿍 끼얹어 둘둘 섞어 후후 불며 떠먹는다. 어릴 적 죽은 아무리 먹어도 '허천병' 난 것 마냥 금세 꺼지고 말았다. 죽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 끼니마다 쌀죽도 아닌 싸래기 죽을 먹으면 입에서 누린내가 날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 집은 쌀을 곳간에 가득 쟁여두고 싸라기를 먹으니 배는 덜 고팠을 것이다. 겨울에도 '묵갈림' 소작을 했던 집의 경우 싸라기에 김치죽 쒀 먹기도 힘들었으니 30년 전 대부분은 농사지은 지 얼마 안된 겨울에도 배고픔을 대비하며 늘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할머니 할아버지에 자식들이 예닐곱은 되었으니 밥 먹을 때 식구(食口) 숫자 보면 밤잠이 오지 않았을 분들이 많았을 게다.


그러니 고구마 삶아 먹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보리쌀에 콩을 섞어 먹고 고구마밥, 무밥, 콩나물밥은 동절기 식솔(食率) 많이 달린 주부가 살림을 해내는 수완이었다. 그런 지혜를 발휘하지 않으면 당장 다가오는 춘궁기를 넘기기 어려웠다.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였다.

기억력 좋은 사람은 안다. 잘 퍼지지 않는 보리쌀을 '확독'에 득득 갈아 미지근한 물에 밤새 불려 놓고 보리쌀 위에 쌀 한 줌 얹어 가마솥에 밥하시는 어머니의 심정. 잠깐 뜸들이고 밥 푸실 때도 조심스럽다.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먼저 어른들 밥 한 그릇 툭 떠 복개 덮어놓으시고 몇 톨 남지 않아 고루 퍼져 있는 쌀을 휘휘 저어 사랑만 듬뿍 담아 골고루 나눠주셨던 어머니 당신의 마음을.


그걸 먹고 우리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다. 나는 마지막까지 차마 지켜 볼 수 없다. 딱 반 그릇 모자라게 밥을 하셔서 밥 식을까봐 얼른 부엌으로 난 쪽문을 통해 상을 들여오신다. 주걱으로 서너 번 득득 문질러 놓고 솥에 불을 때 놓으신 다음 잠깐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신다. 숭늉 뜨러 가신다고 하고는 누룽지 가져와 허기진 배를 마저 물로 채우신 어머니.

그래도 엄중한 엄동설한에는 누추한 집 하나와 사랑하는 가족만 있으면 얼어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체온으로 서로를 녹이고 산에 가 나무만 잔뜩 베어오면 지글지글 끓는 방바닥에 등지지는 재미로 살았으니 말이다.

겨울, 칡 캐기

눈이 나무를 하러 가지 못할 정도만 내려주면 우리는 신이 났다. 그런 날은 괭이와 낫, 톱을 챙겨 뒷산 양지 바른 곳으로 가서 칡을 캐러 가도 어른들이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대밭 가에는 칡이 무던히도 많았다. 먼저 눈을 헤치고 주위 나무와 가시, 넝쿨을 베어 작업하기 좋게 한다. 한 사람은 괭이로 파고 옆에서 거들어 가며 번갈아 30여 분 이상 파 들어가면 팔뚝 보다 큰 칡이 모습을 드러냈다.

윗 부분만 파보고도 그게 밥 칡인지, 술 칡인지, 나무 칡인지 알아야 헛수고를 하지 않은 것이니 이런 눈썰미는 수회를 반복해야만 터득할 수 있는 경지였다. 술 칡은 그래도 물이라도 많아 먹을 만 했는데 나무 칡은 전혀 씹히지 않는 괴상한 것이었다. 말이 칡이지 딱딱하기 이를 데 없어 칡이라 분류하는 것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나무뿌리보다 딱딱하한 섬유질만 가득 들어 있는 칡이 나무 칡이니 곧 묻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허기를 채워준 것은 밥 칡이었다. 밥 칡은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다 캐지도 못했다. 뿌리 자체가 온통 녹말 덩어리이기 때문에 살짝만 연장에 다치거나 한쪽으로 잘못 비틀었다가는 툭툭 끊어지고 만다. 칡 캐면서 목마름을 채우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낫도 쓰지 않고 "찌익~" 찢어 입에 물고 씹으면 씹을수록 마치 쌀밥이 "후두둑 후두둑" 짜내는 듯, 응고된 순두부가 삼베를 비집고 빠져 나오는 느낌을 받는다. 몇 개 먹으면 과히 쓰지도 않고 배를 맘껏 불려줬다. 그날은 온통 흙을 묻혀 와도 꾸지람 듣지 않았다. 양어깨에 팔뚝 보다 두꺼운 칡을 들기 힘들게 집으로 가져왔다.

개밥나무 열매

날이 서서히 풀려 골짜기에 물이 불어날 즈음 봄바람은 여전히 볼을 때려도 아이들은 골짜기로 삼태기 하나 들고 독새기며 개망초를 캐러 갔다. 파릇파릇 돋아난 풀을 캐와서 소에게 주기 위해서다. 간혹 운 좋으면 냇가에 버들강아지를 만날 수 있는데 소가 9할 나머지 1할은 풀 캐러 간 내 몫이었다. '개밥'이라 불렀던 버들강아지 꽃은 쌉쌀한 맛이 있었지만 몇 번 씹으면 껌처럼 먹을 만 했다.

그렇게 긴 겨울을 무사히 났으니 이제 바야흐로 봄이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냉이, 달래, 빡쪼가리, 좁쌀뱅이, 돌나물, 미나리, 민들레 등 수 십가지 나물이었으니 된장과 고추장만 있으면 되는 음식이다. 겨우내 지친 입맛을 돋구고 국물 넉넉하게 부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먹었다. 봄 철 만큼 장볼 일이 없던 때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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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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