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산 주석궁.임미정
4월 12일, 주석궁과 라흐마니노프
오늘은 전 예술단이 아침 일찍 금수산 주석궁을 방문하게 되어 있다. 정장차림으로 7시 반까지 모이라는 지시를 받고 우리는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었다.
주석궁….
이곳은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는 주석의 집무실 겸 거처로 사용되었다가 고인이 된 후로는 Memorial Palace로서 일반인들이 참배를 할 수 있도록 김 주석의 유물과 함께 전시관을 만들었다. 고려호텔에서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금수산이란 지역에 있기에 금수산 기념 궁전이라고도 한다.
내가 그날 느끼고 충격 받았던 것은 보통사람에게 있어서의 김일성 주석의 존재에 대해서이다. 꽤 엄숙하고 삼엄한 경비를 지나 유리관으로 덮힌 김주석의 유해 앞에 갔을 때 평소 명랑하게 우리와 이야기하고 잘 웃던 여자 안내원들이 흐느끼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자기의 감정을 안 보았으면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 방문은 의례적으로 언제나 가야 하는 곳이기에 나로서는 4번째인데, 그전에는 다른 참배객들이 울거나 하면 일부러 오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평소 농담도 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안내원들이 유해에서 눈을 못 떼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을 보니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것은 절대로 일부러 울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었는데 다른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꽤나 애써서 감정을 추스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묘향산에 갔을 때 우리팀과 영화배우들이 같이 구경을 다니게 된 적이 있다. 축전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김주석의 실물과 똑 같은 밀랍동상을 보게 되었는데 영화배우중의 하나가 그 실제적인 모습에 놀랍고 반가워서인지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우리가 통일이 되더라도, 우리 양쪽이 부딪치게 될 진짜 현실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쪽에 있는 우리가 이해하긴 어렵지만, 북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김일성 주석은 말 그대로 마음속에 살아있는 존재인 것 같기 때문이다.
주석궁에 들어갈 때는 비행기에 탈 때와 같은 아니 더 철저한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내게는 이것이 단지 위험한 사람이나 물건의 반입을 차단하기 위해서가 아닌, 김일성 주석으로 대표되는 북의 주체적인 정신 또는, 그 안에 살아있는 주석의 현존을 입증하는 강한 메시지로 느껴졌다.
방문을 마치고 나올 때 마음이 씁쓸했었다. 이곳에 와서 항상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 무엇이든 공통점이 있으면 기뻐했었다. 어떤 땐 사석에서 날 놀리느라 남자들이 가벼운 음담패설 같은 것들을 주고 받아도 왠지 인간적이고 정겹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내가 본, 북쪽의 형제에게서는 이렇게 살아있는 진실이, 남쪽의 대다수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 안다.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합쳐져서 서로를 더 가까이 보게 되면 우리는 과연 성숙하게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많은 시간을 비난하거나 서로를 비웃으면서 보내게 될지….
오랫동안 우리는 유효기간이 짧은 가치관들로 서로를 상처주고 판단해 왔고, 앞으로 또 오랫동안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시간은 우리를 동일화시킬 것이고 새로운 공통의 가치관을 만들 것이라고 추슬렀다.
이날 오후, 다시 중앙 노동자회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공연준비에 바빴다. 아침 리허설들을 못했기 때문에 무대 뒤는 난리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오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게 되어 있고 ‘결전의 길로’와는 매우 다른 테크닉을 사용해야 하는데, 팔 근육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 다시 긴장하고 있었다. 연습실에서 무대에 나갈 때까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항상 내가 미리 가서 기다려서 그랬는지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내 차례가 온 줄도 모르고 앉아 있는데, 홍동무가 헐레 벌떡 달려와, "누님, 뭐 하고 계시는 거야요?" 한다.
둘이 무대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그대로 무대로 걸어나가야 했다. 벌써 사회자가 ‘국제콩쿨 수상자 누구’라고 소개를 마친 후였다(북에선 이렇게 국내 콩쿨 수상자, 혹은 국제 콩쿨 수상자, 공훈 배우, 인민 배우라는 식의 급으로 소개한다).
라흐마니노프….
정말 낭만적인, 작곡자의 향수와 우울이 배어나는 곡. 그는 내가 살던 뉴욕의 아파트 근처에 살았었다. 다른 시기를 살았지만 이웃인 셈이다. 나는 연주라는 작업의, 공간과 시간의 초월성에 대해 아직도 신기하게 느낀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에서 교육받았으나 소련이 된 후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살게 되었다. 무척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생애 내내 지독한 향수와 우울에 시달렸다. 그의 곡에는 제정말기의 러시아가 이루어 놓은 화려함과 낭만이 있다.
그러나 우울함과 비애도 깔려 있다. 그 개인의 것만이 아닌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적인 어두움 말이다. 그는 거의 100년전에 그것을 악보로 표현했고 나는 그것을 이 북쪽의 8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소리를 통해 이 청중들에게 살아 있는 느낌으로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