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궁과 라흐마니노프

[국제친선음악제] 피아니스트 임미정 교수의 평양 방문기-5

등록 2003.05.02 11:43수정 2003.05.0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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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0일부터 일주일 동안 평양에서는 국제친선음악제가 개최됐다. 피아니스트이며 울산대 음대 교수인 임미정씨(홈페이지 www.mijungim.com)는 재미예술단의 일원으로 이번 행사에 참가했다가 지난 19일 귀국했다.

임 교수는 오랫동안 미국에서 연주활동을 하며 세 번의 방북연주 등을 통해 남북 민간 문화교류를 해왔고, 작년 그의 순회독주회시 북한의 피아노곡을 우리나라에서 초연했다. 이번 행사에서 방북했던 임 교수가 <오마이뉴스>에 '평양 방문기'를 보내왔다. 이번이 다섯 번째 기사이다. 아래는 지난해 10월 12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있었던 임미정의 순회독주회 실황연주이다...편집자주)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D장조, Op. 23 No.4

전권(북한곡) 아리랑



금수산 주석궁.
금수산 주석궁.임미정

4월 12일, 주석궁과 라흐마니노프

오늘은 전 예술단이 아침 일찍 금수산 주석궁을 방문하게 되어 있다. 정장차림으로 7시 반까지 모이라는 지시를 받고 우리는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었다.

주석궁….

이곳은 김일성 주석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는 주석의 집무실 겸 거처로 사용되었다가 고인이 된 후로는 Memorial Palace로서 일반인들이 참배를 할 수 있도록 김 주석의 유물과 함께 전시관을 만들었다. 고려호텔에서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금수산이란 지역에 있기에 금수산 기념 궁전이라고도 한다.

내가 그날 느끼고 충격 받았던 것은 보통사람에게 있어서의 김일성 주석의 존재에 대해서이다. 꽤 엄숙하고 삼엄한 경비를 지나 유리관으로 덮힌 김주석의 유해 앞에 갔을 때 평소 명랑하게 우리와 이야기하고 잘 웃던 여자 안내원들이 흐느끼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자기의 감정을 안 보았으면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 방문은 의례적으로 언제나 가야 하는 곳이기에 나로서는 4번째인데, 그전에는 다른 참배객들이 울거나 하면 일부러 오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평소 농담도 잘하며 친하게 지내던 안내원들이 유해에서 눈을 못 떼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모습을 보니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것은 절대로 일부러 울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었는데 다른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꽤나 애써서 감정을 추스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묘향산에 갔을 때 우리팀과 영화배우들이 같이 구경을 다니게 된 적이 있다. 축전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김주석의 실물과 똑 같은 밀랍동상을 보게 되었는데 영화배우중의 하나가 그 실제적인 모습에 놀랍고 반가워서인지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우리가 통일이 되더라도, 우리 양쪽이 부딪치게 될 진짜 현실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쪽에 있는 우리가 이해하긴 어렵지만, 북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김일성 주석은 말 그대로 마음속에 살아있는 존재인 것 같기 때문이다.

주석궁에 들어갈 때는 비행기에 탈 때와 같은 아니 더 철저한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내게는 이것이 단지 위험한 사람이나 물건의 반입을 차단하기 위해서가 아닌, 김일성 주석으로 대표되는 북의 주체적인 정신 또는, 그 안에 살아있는 주석의 현존을 입증하는 강한 메시지로 느껴졌다.


방문을 마치고 나올 때 마음이 씁쓸했었다. 이곳에 와서 항상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 무엇이든 공통점이 있으면 기뻐했었다. 어떤 땐 사석에서 날 놀리느라 남자들이 가벼운 음담패설 같은 것들을 주고 받아도 왠지 인간적이고 정겹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내가 본, 북쪽의 형제에게서는 이렇게 살아있는 진실이, 남쪽의 대다수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 안다.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합쳐져서 서로를 더 가까이 보게 되면 우리는 과연 성숙하게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면 많은 시간을 비난하거나 서로를 비웃으면서 보내게 될지….

오랫동안 우리는 유효기간이 짧은 가치관들로 서로를 상처주고 판단해 왔고, 앞으로 또 오랫동안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시간은 우리를 동일화시킬 것이고 새로운 공통의 가치관을 만들 것이라고 추슬렀다.

이날 오후, 다시 중앙 노동자회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공연준비에 바빴다. 아침 리허설들을 못했기 때문에 무대 뒤는 난리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오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게 되어 있고 ‘결전의 길로’와는 매우 다른 테크닉을 사용해야 하는데, 팔 근육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 다시 긴장하고 있었다. 연습실에서 무대에 나갈 때까지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항상 내가 미리 가서 기다려서 그랬는지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내 차례가 온 줄도 모르고 앉아 있는데, 홍동무가 헐레 벌떡 달려와, "누님, 뭐 하고 계시는 거야요?" 한다.

둘이 무대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그대로 무대로 걸어나가야 했다. 벌써 사회자가 ‘국제콩쿨 수상자 누구’라고 소개를 마친 후였다(북에선 이렇게 국내 콩쿨 수상자, 혹은 국제 콩쿨 수상자, 공훈 배우, 인민 배우라는 식의 급으로 소개한다).

라흐마니노프….

정말 낭만적인, 작곡자의 향수와 우울이 배어나는 곡. 그는 내가 살던 뉴욕의 아파트 근처에 살았었다. 다른 시기를 살았지만 이웃인 셈이다. 나는 연주라는 작업의, 공간과 시간의 초월성에 대해 아직도 신기하게 느낀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에서 교육받았으나 소련이 된 후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살게 되었다. 무척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생애 내내 지독한 향수와 우울에 시달렸다. 그의 곡에는 제정말기의 러시아가 이루어 놓은 화려함과 낭만이 있다.

그러나 우울함과 비애도 깔려 있다. 그 개인의 것만이 아닌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적인 어두움 말이다. 그는 거의 100년전에 그것을 악보로 표현했고 나는 그것을 이 북쪽의 8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소리를 통해 이 청중들에게 살아 있는 느낌으로 전달한다.

중앙방송에서 방송된 임미정.
중앙방송에서 방송된 임미정.
우리는 멜로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만일 첼로가 조금 늦게 나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가 나오거나, 지휘자가 10분의 1초 정도 뜸을 들이면 우리 모두는 10분의 1초만큼 기다렸다 나온다.

중간의 플룻은 나와 대립되는 곡선으로 노래하는데 그녀의 선율이 약간 각이 지게 나온다면 나 또한 각이 지는 선율을 만든다. 그 곡이 연주되는 20여분 동안은 100년전의 러시아와 라흐마니노프가, 그리고 남쪽에서 온 피아니스트, 미국서 온 지휘자, 북에서 교육받고 연습해온 80명의 단원들,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만든 야마하 피아노가 무엇인가 살아있는 느낌을 뿜어낸다.

사람들…. 평양의 중앙노동자회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그 어울림으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전해지는 다른 인간들의 숨결을 듣는다.

음악은 그런 것이다….

20년 전인 1983년 봄, 나의 음악 생활 중 최초의 본격적인 성공 및 연주라 할 수 있는, KBS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있었다. 나는 고3인데도 공부대신 피아노만 치느라, 기쁘지만 불안한 가운데 여의도 KBS홀에 연주하러 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이라 녹화를 한다고 했었는데, 그 당시 시작했던 이산가족 찾기 운동 때문에 KBS방송국 앞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이 운동은 전쟁 후 헤어진 많은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TV에서 공고해 서로를 만나게 해주었던 프로그램으로, 국내뿐 만이 아닌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건(?)이다. 방송국 주변은 전국에서 올라온 이산 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것을 기획한 방송국도, 또 온 국민들도 그 엄청난 현실과 결과로 인해 충격에 빠졌던, 80년대의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이다.

울부짖는 사람들, 다닥 다닥 붙은 종이들, 그것을 취재하는 내외신 기자들. 방송국 앞에는 이땅에서 생이별의 아픔을 겪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불행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연주를 위해 KBS방송국에 도착한 나는 이 이산가족 찾기 때문에 모든 카메라가 동원되어 정작 연주녹화는 할 수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돌아왔고 계속 다음 주로, 또 그날 가보면 다음 주로….

이렇게 한 학기 내내 미루어져서 고 3인 나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그리고 매번 KBS방송국에 갈 때마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지긋지긋했던 이산가족 찾기를 보아야 했고…. 결국 학기 말 시험 중에 녹화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정말이지 울면서 연주했었다. 한 학기 동안의 마음 고생 때문이었다.

또한 나의, 계속 연기되는 연주 때문에 정신이 없으셨던 어머님은 아버님의 병이 징후를 보이고 있었음에도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는 그분의 암세포를 너무 늦게 발견했고 내 연주 세 달 후에 아버님은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분의 병과 운명이 조금 일찍 치료를 받았다 해서 달라지진 않았겠으나, 나는 내 연주만, '이산가족 찾기만 아니었더라면'하는 생각을 아직도 가끔 한다….

그때 연주한 곡이 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이다. 그 당시 미국에서 갓 귀국했던 이동우 선생님은 같이 연주했던 KBS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로서, 20년이 지난 지금은 직장 동료로서 다시 만나 지금 여기 평양에 같이 왔다.

소설에는 복선이란 것이 있다. 가끔 옛날을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서도 일부러 끼어 맞춘 듯한 복선을 발견한다. 20년 전의 라흐마니노프와 오늘 이 중앙노동자회관에서의 라흐마니노프같이 말이다.

4월 9일 오전 7시47분 호텔방에서 바라 본 평양시.
4월 9일 오전 7시47분 호텔방에서 바라 본 평양시.
13일, 평양의 아침.
13일, 평양의 아침.
거리에 나붙은 축전 포스터.
거리에 나붙은 축전 포스터.
공연후 커튼 콜을 하는 7조 예술단.
공연후 커튼 콜을 하는 7조 예술단.
두영균과 극장 도우미들.
두영균과 극장 도우미들.
고통련 모란봉 가극단원들.
고통련 모란봉 가극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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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정 기자는 피아니스트로서 현재 울산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이다. 귀국전 14년간 뉴욕에 거주, 평양에서의 연주 및 뉴욕에서의 북한 음악 연주등을 통해 민간 문화교류를 해왔다. 2002년 그의 피아노 독주회시 아리랑과 내고향의 정든 집 등 북한의 피아노곡을 국내 초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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