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시나한테 줄라꼬 그라제?"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73> 자운영과 토끼풀

등록 2003.05.01 13:53수정 2003.05.0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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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들판에서 꽃잔치를 벌이고 있는 자운영꽃

들판에서 꽃잔치를 벌이고 있는 자운영꽃 ⓒ 우리꽃 자생화

"아빠! 운영이는 너무도 예뻐. 이 운영이꽃으로 머리핀을 만들어 줘. 그리고 토끼풀꽃으로는 반지랑 시계를 만들어 줘."
"그래. 빛나도 자운영꽃이나 토끼풀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싶은가 보구나."
"어때? 아빠."
"어디 보자. 이야! 우리 빛나가 꽃보다 더 예쁘구나."


둘째딸 빛나는 자운영꽃을 운영이꽃이라고 불렀다. 이는 빛나 나름대로 꽃이름을 기억하는 방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빛나를 데리고 산보라도 나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길가에 피어난 꽃들의 이름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내가 여러 가지 꽃들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가르쳐 주어도 쉬이 잊어먹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내가 들판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랏빛 꽃을 가리키며 빛나에게 "이 꽃은 무슨 꽃?"하고 물었다. 그러자 빛나는 이내 "음~ 운영이, 그래 자운영꽃이야"라고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어"하자 빛나는 씨익 웃으면서 "우리 반 친구 중에 운영이란 애가 있거든"하고 말했다.

기특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빨갛게 피어난 꽃을 가리키며 "이 꽃은 무슨 꽃?" 하고 물었다. 그러자 빛나의 입에서는 이내 "맹자? 맞아, 명자꽃이야"하고 대답했다. 내가 또다시 "어떻게 알았어" 라고 묻자 빛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가 경상도 사람들은 명자를 맹자라고 부른다고 그랬잖아."

비음산 아래 다랑이 논둑 곳곳에서 자운영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그 곁에서는 토끼풀들이 예쁜 하트 모양의 잎사귀 속에 마치 솜뭉치 같은 하얀 꽃송이를 줄줄이 밀어올리고 있다. 제법 맑은 물이 출렁대는 논에서는 바람이 불 적마다 잔잔한 주름살을 잡고 있다.

그래. 자운영꽃과 토끼풀꽃은 닮은 곳이 많다. 자운영꽃의 연보랏빛 색깔만 아니었다면 둘 다 여러 개의 꽃들이 동그랗게 모여 피어나는 꽃송이도 그랬다. 또한 꽃대를 밀어올리는 하트 모양의 잎사귀도 그러하다. 그래. 그래서 둘은 비슷한 장소에서 같이 어울려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보랏빛 자운영꽃의 화려한 모습에 비해 하얀 얼굴을 한 토끼풀꽃이 어쩐지 연약하고 초라해 보인다. 마치 자운영꽃들의 화려한 잔치마당에 들러리라도 서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둘 다 가늘고 긴 목을 쭈욱 뺀 채 꽃망울을 달고 있는 모습은 색깔만 다를 뿐 그 모습은 빼다 박았는 데도 말이다.

a 꽃반지, 꽃시계를 만들었던 토끼풀꽃

꽃반지, 꽃시계를 만들었던 토끼풀꽃 ⓒ 우리꽃 자생화

그러나 자운영꽃은 그 화려한 모습에 비해 꽃대가 너무나 연약하다. 그리고 꺾으면 금세 시들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토끼풀꽃은 꽃대가 제법 질기고 꽃도 금방 시들지 않는다. 또 자운영 풀잎은 토끼풀처럼 하트 모양을 지니고 있지만 아무리 찾아도 네 잎이 달린 그런 클로버는 없다.


"니 낼로 우째 생각하노?"
"그기 머슨 말고?"
"이 문디 머스마야! 니는 눈치가 그리도 없나?"
"???"
"니 오늘 내한테 네 잎 크로바로 선물 좀 해라."
"와?"
"그걸 꼭 말로 해야 되것나?"

그날 나는 그 가시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풀을 베는 것도 잊고 네 잎 클로버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바지에 풀물이 들도록 토끼풀밭을 뒤져도 네 잎 클로버는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토끼풀꽃을 한묶음 따서 그 가시나에게 줄 꽃시계와 꽃반지를 여러 개 만들었다.

토끼풀꽃으로 꽃시계와 꽃반지를 만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우선 토끼풀꽃을 두 개 딴다. 그리고 꽃대가 약간 굵은 토끼풀꽃의 꽃대를 손톱으로 누르면 갈라진다. 그러면 남은 꽃대, 그러니까 가늘고 긴 토끼풀 꽃대를 그곳에 끼우고 잡아 당기면 꽃 두송이가 예쁘게 모인다. 그 다음, 손목이나 손가락에 끼운 뒤 적당한 길이로 자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운영꽃은 꽃대가 약하기 때문에 꽃시계나 꽃반지를 만들 수가 없었다. 또 자운영꽃은 따자마자 이내 시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자운영꽃을 한묶음 꺾은 뒤 까만 고무신에 냇물을 퍼담고 그곳에 자운영꽃을 담궈놓았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 가시나의 예쁜 보조개를 떠올렸다.

"니 소풀은 안 베고 그기서 뭐하고 있노?"
"더버서(더워서) 발 좀 씻는다 아이가."
"가시나 맨치로(같이) 그 꽃들은 또 뭐꼬?"
"아... 아무 것도 아이다. 꽃이 하도 이뻐서 그냥 꺾어 본 기다."
"니 그 꽃을 그 가시나한테 줄라꼬 그라제?"
"아... 아이라카이"

a

ⓒ 우리꽃 자생화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인가 위였던 마을 형님은 벌써 소풀을 한짐 지고 둑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리고 맨발로 논둑으로 나가 서둘러 소풀을 베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풀을 한짐 베기에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벌써 해가 마산쪽 하늘로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급한 김에 무논에 들어갔다. 그 무논에는 우리들이 '독새풀'이라고 불렀던 뚝새풀이 몹시 많았다. 독새풀은 벼꽃처럼 연갈색 꽃이 피기 전까지는 아주 좋은 소풀이었다. 하지만 꽃이 피기 시작한 독새풀은 마치 금방 올라온 수양버들처럼 몹시 거셌다. 또 그렇게 거센 독새풀은 소가 잘 먹지 않았다.

하지만 우선 삽짝문에 들어설 때 부모님께 눈가림이라도 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허연 분가루 같은 것이 묻어나오는 독새풀을 서둘러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독새풀을 한짐 가까이 베어갈 때였다. 아야. 갑자기 발이 따끔했다. 그리고 따끔했던 그 발을 들었을 때 무언가 길죽한 것이 독새풀 속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순간 머리 끝이 쭈뼛했다. 혹시 독사라면? 나는 서둘러 지게 작대기를 가지고 와서 독새풀을 헤집어 그 뱀을 찾아냈다. 그리고 지게 작대기로 그 뱀의 머리를 누르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휴우, 다행이었다. 그 뱀은 우리가 흔히 보는 물뱀이었다. 나는 지게 작대기로 그 뱀을 들어올려 멀리 내던졌다. 그 뱀이 물었던 발에는 마치 역삼각형 모양의 빨간 핏자국이 세 군데나 찍혀 있었다.

"니 오래 기다맀제?"
"그래. 근데 와 이래 늦었노?"
"우짜꼬? 네 잎 클로바로 못 찾아서."
"괘않다."
"아나."

a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아서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아서 ⓒ 우리꽃 자생화

그날 내가 건네준 토끼풀꽃 꽃반지와 꽃시계, 그리고 자운영 꽃다발을 받은 그 가시나는 탱자꽃처럼 하얗게 웃었다. 그리고 그 탱자꽃 울타리 곁에 피어난 연분홍 철쭉처럼 바알간 볼에 그 예쁜 볼우물을 지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니 마음을 인자 알았으니까 더 이상 네 잎 클로버를 찾지 않아도 된다고.

"아빠! 무슨 생각해?"
"으응. 잠시 아빠 어릴 때 생각을 했어."
"아빠 어릴 때는 이 토끼풀꽃으로 무얼 만들었어?"
"지금처럼 꽃반지도 만들고 꽃시계도 만들고 그랬지. 그리고 네 잎 클로바도 찾고.."
"네 잎 클로바?"
"그래. 네 잎 크로바를 찾으면 행운이 온대."
"아싸! 나도 찾아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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