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25

은폐된 진실 (5)

등록 2003.05.06 12:20수정 2003.05.0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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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옥이 놀란 것은 그녀가 발가벗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바로 조관걸의 하나뿐인 여식인 조연희였기 때문이었다.

이회옥은 시선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당혹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죽고 싶다는 절망감이 한데 어우러진 묘한 눈빛이었던 것이다.


하긴 사내를 모르는 청백지신(淸白之身)이건만 발가벗겨진 채 사내의 눈앞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니 당황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부끄러움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죽고싶다는 치욕을 느꼈을 것이다.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이회옥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생각하고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나, 낭자! 잠, 잠깐만 기, 기다리시오. 소, 소생이 푸, 풀어 드,드리겠소이다."

이회옥은 심하다 할 정도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하긴 생전처음 성숙한 여인의 나신을 보았으니 당황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지만 방금 전에 보았던 영상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보이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하여 황급히 다시 돌아섰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조연희가 알아차릴까 싶었던 것이다.

"으으읍! 으으읍!"
"이크! 미, 미안하오."


뒤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이회옥은 침상 귀퉁이에 묶인 끈을 풀려다가 그만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발목에 묶인 끈을 풀어야 하는데 잘못해서 종아리를 만졌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있던 그는 이번에는 침상의 기둥을 먼저 더듬었다. 이렇게 하면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하여 발목을 정확히 잡기는 하였다.

하지만 또 다시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너무도 부드러운 피부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발바닥을 만졌는데 간지러운지 움찔하는 바람에 놀랐던 것이다.

잠시 심호흡을 한 이회옥은 다시 끈을 풀기 시작하였다. 어찌나 단단히 결박했는지 하나를 풀어내는데 일 각이 넘게 걸렸다. 하여 네 귀퉁이 모두를 풀어내는데 무려 반 시진이나 소모했다.

이회옥은 바보임이 분명하였다!

처음부터 손목이 묶인 두 군데를 풀었다면 나머지는 조연희가 알아서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보같이 발목 먼저 풀고 그 다음에 손목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손발 모두가 자유롭게되자 조연희는 재빨리 재갈을 풀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의복을 걸쳤다.

"흐흐흑! 흐흐흐흑! 흐흐흑!……"

이회옥은 조연희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 의복은 모두 걸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면 어떻게 하여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지 몰라 돌아설 수 없었으며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흐흐흑! 흐흐흐흑!…"
"어험! 어어험!"

이회옥이 헛기침 소리를 낸 것은 대략 일 각이 지난 후였다. 조연희의 흐느끼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조, 조 낭자!"
"흐흑! 흐흐흑!"
"미, 미안하오. 소, 소생이 잘못하였소이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거나 바보같이 되는 법이다. 지금 이회옥이 바로 그랬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잘못했다는 소리부터 하는 것이 그랬다.

"흐흑! 흐흐흑! 아니에요. 흐흑!"
"나, 낭자! 이제 그만 우시오. 그러나 원기를 상하겠소."

"흐흑! 아, 알았어요. 안 울게요. 하지만, 하지만… 어어어엉!"
지금껏 흐느끼기만 했던 조연희가 갑작스럽게 오열하자 이회옥은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이런 젠장!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젠장! 대체 왜 우냐고? 내가 뭘 잘못한 거냐? 난 울지 말라고 한 것뿐인데. 젠장! 이런 땐 울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럼 뭐라고 하지? 울라고 하나?'

"어어어엉! 어어어엉!"

'아이고, 젠장! 젠장! 우와! 미치겠네.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조연희의 오열소리가 그칠 줄 모르자 이회옥의 손바닥과 등에서는 식은땀이 솟아났다. 이런 경험이 전무(全無)한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 한마디 잘못한 것 가지고 이러니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적중하였다. 조연희의 오열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흐느낌으로 바뀌었고, 잠시 후에는 그마저도 잦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눈치를 살핀 이회옥은 조연희가 침상에 엎드려 있자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낭자! 무조건 소생이 잘못하였소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우시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알려주셨으면 하오."
"흐흑! 흐흐흑!"

'허억! 또 잘못 말한 건가? 휴우…! 이번엔 아닌 모양이군."

조연희가 또 흐느끼는 듯하여 놀랐던 이회옥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흐느낌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낭자! 다향루에 있어야 할 낭자가 어떻게 여기에…?"
"흐흑! 공자님, 우리 아버님 좀 살려주세요. 흐흐흑!"

"아버님이라니요? 낭자의 아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흐흑! 그래요. 놈들이 아버님을… 아버님을… 흐흑! 소녀도 놈들에게 잡혀와서… 흐흑! 이렇게… 흐흐흐흑!"

이회옥은 조관걸이 잡혀왔다는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엎어지려는 조연희의 양쪽 어깻죽지를 잡아 세웠다.

"낭자! 울지만 말고 제대로 말씀하시오. 무슨 말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니오?"
"흐흑! 공자님, 놈들이 무림천자성 놈들이 아버님을… 흐흑! 아버님을 잡아갔어요. 소녀는 못 가게 말리려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깨어나 보니 여기에… 흐흑! 여기에 있었어요. 흐흑!"

"그게 무슨 소리요? 낭자의 아버님이신 조관걸 어르신이 여기에 잡혀왔다는 말씀이오?"

"흐흑! 그래요. 놈들이 워낙 강해서 아버님은 반항도 제대로 못하고…. 흐흑! 공자님도 무림천자성 사람이니 소녀의 아버님을 구해 주세요. 흐흑! 아버님만 구해주시면 무엇이든 공자님의 뜻대로… 흐흑! 아버님을 구해 주세요. 흐흐흐흑! 끄으응!"
"앗! 낭자, 정신을 차리시오. 낭자! 낭자! 정신 차리시오."

말을 하던 조연희가 혼절하자 이회옥은 재빨리 받아 안았다.

"낭자! 정신을 차리시오. 낭자! 젠장! 이럴 땐 어떻게 하지?"

갑작스런 혼절에 당황한 이회옥의 뇌리로 오래 전에 헤어진 왕구명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이 혼절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어. 이럴 땐 당황하지 말고 뺨을 가볍게 두들겨봐. 대부분 정신을 차릴 거야. 그래도 안 되면 얼굴에 물을 뿌려봐. 그래도 안 되면 침을 놓거나 추궁과혈(推宮過穴)하는 방법이 있어."

"추궁과혈? 그건 뭔데?"
"하하! 녀석, 추궁과혈이란 고수들이 내상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방법인데 내공으로 막힌 혈도를 문질러서 풀어주는 거야. 고수들은 이 방법만으로도 웬만한 병은 다 치료해. 그래서 고수가 되면 의원한테 안 가도 되지."

"우와! 정말?"
"그럼!"

"형, 어저께부터 허리가 아팠는데 형이 추궁과혈 좀 해주라."
"그래? 좋아, 그럼 옷 좀 벗어봐."

"왜?"
"추궁과혈을 하려면 혈(穴) 자리를 잘 보고 문질러야 해. 그런데 옷을 입고 있으면 어디가 혈 자리인줄 알 수가 없잖아."
"어, 그래? 알았어."

이날 이회옥은 허리 아팠던 것이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몸이 결리고 하면 아픈 부위 부근을 부드럽게 주물러 풀었다.

사실 왕구명이 그 날 해준 것은 추궁과혈이 아니었다. 내공을 이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회옥이 사용한 방법도 추궁과혈은 아니었다. 단지 긴장으로 인하여 뭉쳐진 근육을 풀어준 것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런 것들 때문에 이회옥은 추궁과혈을 하면 혼절한 사람의 정신을 되돌릴 수 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축 늘어져 있는 사람이 여인이라는 것이다. 추궁과혈을 하려면 의복을 모두 벗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으음! 어떻게 해야 하나?'

이회옥으로서는 심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한참을 고심하였다.

"에이! 할 수 없지. 너무 울어서 원기까지 상한 모양이니. 천상 그 방법밖에 없겠어. 흐음! 이 옷은 어떻게 벗기지?"

이회옥은 조연희가 걸친 의복을 벗겨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조연희가 걸치고 있는 의복은 중원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여 잠시 살펴보니 가슴 부위에 묶인 끈을 풀어내면 될 듯 싶어 그것을 막 잡아당길 때였다.

"끄으으응! 여긴… 어멋! 뭐 하는 거예요?"
"허억! 나, 낭자! 저, 정신이 드셨소?"

"아악!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아악! 이 색한(色漢)!"
"으헉! 이를 어째? 나, 낭자 미, 미안하오."

조연희가 걸친 의복은 해동 땅 한족(韓族)들이 걸치는 것으로 저고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회옥이 잡아당기려 한 것은 앞섶에 달린 옷고름이라는 것이다.

조연희가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려는 순간 이회옥은 옷고름을 잡아 당겼다. 잠시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매듭이 풀리면서 앞섶이 벌어지면서 불룩한 가슴이 드러났다. 놀란 조연희는 재빨리 앞섶을 여미며 소리쳤다. 곧이어 그녀의 봉목에서는 또 다시 이슬이 흘러내렸다.

"흐흑! 흐흐흐흑!"

조연희는 자신이 이회옥의 품에 있었던 것하며 그가 옷고름을 풀어낸 것을 보고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 생각하였다.

조금 전 보여줘서는 안 될 것을 보여준 이후 결심한 것이 있었다. 여인에게 있어 정절이라는 것을 목숨만큼 중요한 것이다.

과년한 나이가 되어 사내에게 속살을 보였다는 것은 청백을 상실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회옥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생을 의탁할 결심을 한 바 있었다.

아니면 불문에 귀의하거나 스스로 자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위안이 된 것은 그의 됨됨이가 올곧고,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잠시 정신을 잃은 자신을 겁탈하려 하였다. 그런 색한에게 일생을 의탁하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억울하다 생각되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은 것이다.

"나, 낭자! 그게 아니고…"
"흐흐!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흐흐흑!"

'이런 젠장!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더니…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오늘 대체 왜 이러지? 어휴…!'

이회옥은 억울하였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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