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우산 가져 간 줄도 몰랐냐?

우산에 얽힌 추억의 단상들

등록 2003.05.07 07:48수정 2003.05.0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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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친구네 집에 들른 막내, "야, 우리 집에 놀러가자" 그러나 비가 그치면 놀러가라는 말에 실망을 하고 돌아옵니다.

친구네 집에 들른 막내, "야, 우리 집에 놀러가자" 그러나 비가 그치면 놀러가라는 말에 실망을 하고 돌아옵니다. ⓒ 김민수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립니다. 제주는 5월에 비가 많이 오긴 하는데 올해는 마치 장마철처럼 맑은 날을 맞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농작물에 병충해가 많이 온다고 하니 걱정도 되고, 집안 전체가 눅눅하기도 하고, 교인들 중에는 노인 분들이 많은데 관절통이 더 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제 그만 그쳐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오늘 새벽에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맑은 날이 그리운 날입니다.


어제는 비가 와서 막내 하교길 마중을 나갔습니다. 유치원에 가보니 이미 친구와 집엘 갔다고 합니다.
'어디로 간 것일까?'
사귐성이 유난히 좋아서 유치원 친구들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형아들이며 누나들 이름까지 줄줄 외우고, 형아들 좇아 다니는 막내. 혹시 아이들의 단골집 '승희상회'에 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되어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a "아빠, 비 그치면 놀러온데. 근데 왜 마중나왔어? 아빤 나 우산가져 간 줄도 몰랐냐?"

"아빠, 비 그치면 놀러온데. 근데 왜 마중나왔어? 아빤 나 우산가져 간 줄도 몰랐냐?" ⓒ 김민수

좁은 돌담길을 따라 두 아이가 우산을 쓰고 장난을 치며 깔깔거립니다. 그 중 한 놈은 막내였습니다. 우산을 쓰긴 썻는데 장난을 치느라 머리가 비가 젖어있습니다. "방패 돌리기!"우산을 돌리며 물방울을 튀겨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우산에 얽힌 추억의 단상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것이 우산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우산이 귀했습니다. 대나무로 골격이 갖추어진 파란 비닐우산, 바람이 불면 훌떡 뒤집혀서 난감하게 했던 우산이기도 했지만 파란 비닐우산 아래서 듣든 빗방울 소리의 향연은 그럴 듯 했습니다. 찢어진 우산대는 소중하게 모셔두었다가 댓살을 정성껏 깍아 연을 만드는데 사용했죠.

비닐우산이라도 있으면 감지덕지지만 대부분 우산도 없이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때 우산대용으로 사용되던 것이 토란잎이었습니다. 토란이파리에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가는 모습은 장관이었죠. 토란이파리에 물방울들이 모여 이슬방울처럼 이리저리 모여드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습니다.

하교길에 갑자기 비가 오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비를 맞으며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했지만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나온 어머니들도 있었죠.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에 속하던 나는 '우리 엄마도 저기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헛된 희망사항을 가지곤 했죠. 단 한번도 비가 온다고 마중을 나온 적이 없으신 어머님, 그러나 그 고단한 삶을 알기에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청소년기, 비온다는 예보를 믿고 우산을 가져갔다 하교길에 맞추어 비가 오면 하얀 하복을 입고 우산이 없어 발을 동동구르는 여학생에게 우산을 받쳐주며 콩닥거리던 마음,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우산을 건내 주고는 가방을 옆에 끼고 쏟아지는 빗속을 용감하게 뛰어가며 '어머, 멋있어!'하고 바라봐 주길 바라던 청소년기의 추억. 그것이 계기가 되어 떡볶이라도 함께 먹을 시간이 주어지면 친구들에게 한편의 연애소설을 쓰듯 호들갑을 떨던 일이 생각았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마음만 먹으면 우산을 가지고 다닐 수 있었을 때에는 버스며 지하철에 우산을 놓고 내리는 통에 웬만한 비에는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는 뛰어 다니는 것이 차라리 속이 편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TV화면으로 고관대작(?)들의 비서가 검은 우산을 바쳐 들고 자신들은 비를 쫄딱 맞아가며 고관대작의 옷에 빗방울이 튈새라 노심초사하는 것을 본 이후에는 연민의 정보다 비굴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죠.

아들과 함께 우산 두 개가 나란히 서기도 좁은 돌담길을 걸어오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강 우산 노랑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하고 걸어갑니다.


"아빠, 아빤 내가 우산 가져간 줄도 몰랐냐? 마중 나오게?"
아빠가 마중 나온 것이 좋으면서도 혼자서도 집에 잘 올 수 있었는데 마중 나왔다며 시비를 겁니다. 그 이유는 승희상회에 가서 장난감 하나 사달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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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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