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들머리, 항아리의 주둥이 모양으로 몹시 좁았다. 독립군이 적을 이곳으로 유인하였다.박도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 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케 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그날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 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일본군 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추격대 본대를 불러서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월강 추격대는 봉오동 하동을 실컷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중동,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상동 남쪽 300m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를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을 앞세우고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일본군 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투는 무모했음을 알아차리고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를 혼비백산케 했다. 통쾌한 승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전상자(戰傷者) 피해는 독립군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인 당시 중국〈상해시보〉에 따르면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봉오동 전적비는 봉오동 저수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 아래 조촐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 전적비 제단에다 서울에서 준비해 온 소주를 드린 후, 땅바닥에 엎드려 두 번 큰절을 하고 남은 술은 전적비 언저리에다 뿌렸다. 이 깊은 계곡에서 이름 없이 순국한 무명용사와 무고히 죽어간 양민들의 영령을 진혼하고자 하는 자그마한 정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