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박도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
교회당 옆 마당에는 암탉 수탉들이 어울려 한가로이 모이를 쪼고 있었다. 닭들은 낯선 나그네에 대한 경계도 전혀 없었다.
지난날 우리나라 농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보기 드물어 이국에서 본 정경이 내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켜 카메라 셔터를 눌렸다.
윤동주 생가는 명동 교회와 널빤지로 이은 야트막한 울타리로 이어져 있었다. ‘윤동주 생가 옛터 소개’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시인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할아버지 윤하헌 선생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의 본체와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 구조로 된 집이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전학하게 되자 그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팔려서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