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고 그렇다"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77> 스승의 날에

등록 2003.05.15 12:46수정 2003.05.1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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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생님께 이 꽃을 바칩니다/덜꿩나무

선생님께 이 꽃을 바칩니다/덜꿩나무 ⓒ 우리꽃 자생화

길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때 끊어지는 길을 이어주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선생님입니다



어제 오후, 하동 천승세 선생님께 전보를 보냈다. 오전 내내 이번에는 무슨 내용의 글을 써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문득 길이 떠올랐다. 그래. 선생님은 바로 내가 걸어가는 척박한 길을 다져주는 길라잡이가 아닌가. 또한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문득 끊어지려 할 때 그 길을 이어주시는 분이 아닌가.

"선생님! 요즈음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건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마라. 늘 그렇고 그렇다"
"쓰시고 계시는 작품은 뜻대로 잘 마무리 되고 있습니까?"
"그것도 늘 그렇고 그렇다"

며칠 전, 제주도 산간에 칩거하며 집필에 몰두하고 계신 하동 선생님께 안부 전화를 걸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것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내 자신이 너무나 게을러 터진 까닭이다.

그날도 나는 하동 선생님께 안부전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 드렸다. "앞으로는 자주 전화를 올리겠습니다, 선생님"이라고.

하동 선생님은 최근 시인 천상병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책 제목은 <실록소설 천상병-괜찮다 이제는 다 괜찮다>라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은 천상병 시인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 천상병과 삼촌 뻘이기도 한 선생님은 천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상병이 이 처죽일 놈의 새끼가 죽을 때까지 삼촌이라고 부르질 않았다니까요. 세배도 안했구요. 단칸방에 함께 살 때 제 큰아들놈한테 '천승세 이 씨발놈아 빨리 일어나라'고 시키기도 했어요"라고.

내가 하동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 '황구의 비명'을 읽으면서였다. 당시 시인이 되기를 꿈꾸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있었던 내게 '황구의 비명'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자그마한 토종 황구와 어마어마한 체구의 외래종 수캐의 교미장면이 펼쳐지는 그 토종 황구의 비명.


당시 창원에서 살고 있었던 나는 그 이후부터 '점례와 소' '낙월도' '만선' 등을 읽으며 하동 선생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사무국장으로 있었던 시인 김명수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던 작가 천승세 선생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어줍잖은 내 문학의 길을 늘 올곧게 이끌어주는 길라잡이이자, 내가 언젠가는 닿아야 할 문학산맥이 되었다. 그리고 1989년 12월 24일에는 선생님께서 바쁜 일정을 모두 접어둔 채 마산까지 내려와 주례까지 서 주셨다.

"너가 올해 몇 살이지?"
"선생님께서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듬 해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으래? 그러면 내가 당선할 때 너는 너희 집 밭에서 자라는 배추나 무 뿌리였겠구나. 그 참, 허허허"

해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하동 선생님 외에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선생님이 한 분 있다. 그 선생님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셨다.

내 고향은 이북이라던 그 선생님께서는 다른 선생님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선생님은 당시 우리 어머니 말씀처럼 콩 한조각도 같이 나눠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인가 갈색으로 덮힌 맛있는 빵이 한판씩 나왔다. 그 빵은 스무 개 남짓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빵이 나오는 날마다 순서대로 줄을 서서 빵을 타 먹었다. 그날 빵을 타지 못한 아이들은 목에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일주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빵이 나오는 날마다 칼을 들고 와서는 아이들 숫자대로 그 빵을 꼭같은 크기로 잘랐다.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이 한명도 빠지지 않고 빵을 타서 먹을 수 있게 했다. 그 때문에 우리 반 아이들은 비록 토막이 난 작은 빵이었지만 빵이 나오는 날마다 빵을 먹을 수가 있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내 코 끝에서는 금새 그 맛있던 빵내음이 맴돈다. 그와 더불어 반짝거리던 긴 칼로 크기가 꼭같게 빵을 자르던 그 선생님의 가지런한 손이 떠오른다. 양선생님? 그래. 그 선생님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성이 양씨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선생님은 지금 연세가 칠십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나는 꼭 같은 크기로 자른 빵을 한조각씩 나눠 주시던 그 선생님의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양 선생님! 그 양선생님은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

길을 갑니다
끝이 어디쯤인지도 모르는
낯선 이 길을
혼자서 맨발로 걸어갑니다
두렵습니다
온 몸이 푸들푸들 떨립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억지로 떠밀려서라도 가야만 합니다
가다가, 허새비처럼 허우적 허우적 걸어가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저만치 내가 걸어온 길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추억 혹은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길과 함께 천천히 가라앉던 발자국 하나가
긴 혀를 빼물고
내 그림자를 핥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이를 어째
내 그림자를 마구 핥던 발자국 하나가
내 앞에 놓인 길까지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그때 요놈! 하는 소리에
발자국 하나가 길을 놓고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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