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엔 삼계탕을 많이 먹어주십시오.

하림(주)화재로 속상한 농도(農道) 전북의 하소연

등록 2003.05.15 17:52수정 2003.05.15 22:12
0
원고료로 응원
며칠 전 전국 최대의 닭 가공 업체인 (주)하림에 큰 불이 났다. 언론에서는 1100억원 대의 피해라고 소개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림 회장이 불에 탄 공장을 배경으로 어디론가 휴대전화를 하는 모습이 지역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

방송기자는 바로 이어 “사육 중인 닭 2천만 마리가 갈 곳을 잃게 됐다”고 보도했다. 그리고는 다른 뉴스가 나왔다. 불이 난 익산은 내가 살고 있는 전주에서 20km쯤 떨어진 도시. 불똥은 커녕 냄새도 맡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져 있다.

익산은 과거에도 이리역 폭발사고로 홍역을 치른 곳이다. 마음 속으로 “음, 폭발, 화재가 잦은 것으로 봐서 음양 5행중 화기와 가까운게 틀림없어”하고 생각했다.

하림 화재 이후 오늘까지 주요 뉴스는 화물연대의 파업과 노대통령 방미였다. 삼성, LG등 주요 업체의 가전 수출이 차질을 빚었다, 부산항이 사실상 마비됐다, 수도권 생산공장과 부곡 터미널도 화물이 산처럼 적체돼 있다는 등의 뉴스가 줄을 잇더니 오늘 아침에는 타결됐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지, 전라북도는 공장도 항구도 없잖아, 야 참 이럴 때 행복하네”, 군산항과 몇몇 공장이 있지만 사실 이곳은 운송 대란과는 거리가 멀다. 화물트럭이 길을 막는다는지, 항구에 화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든지 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힘들다.

나는 어렸을 적 우화같은 동화가 생각났다. 부잣집에 불이 나 활활 타오르자 다리 밑에서 동냥하던 거지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는 대화,

“아버지, 우리는 불나도 걱정 없죠.”
“그럼 임마, 다 애비 덕인줄 알아라.”


곰곰 생각하니 하림 화재는 부산항 마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안이었다. 우선 이 회사는 1등 없는 전북에서 유일하게 1등하는 회사다. 전라북도에는 컬러 텔레비전, 냉장고 공장도 없고 반도체 공장, 철강 공장도 없다. 전북은행은 지방은행 중 중하위권이고 도내 유통업체는 서울 기업인 이마트가 휩쓸고 있다. 까르푸, 롯데 백화점까지 상륙 차비를 하는데 광주 빅마트같은 변변한 토종 마트도 하나 없다.

건설 분야에서도 외지 업체의 전북 시장 상륙으로 아우성을 칠 뿐 전북 업체가 서울ㆍ경기ㆍ광주ㆍ대전 가서 큰 공사 하나 딴 적도 없다. 농민의 아들ㆍ딸답게 참을성 하나는 일등이지만 나머지 제조ㆍ유통ㆍ금융ㆍ건설등 모든 산업 분야는 꼴등이거나 제 밥도 제대로 못 찾아먹는 순둥이가 바로 전라북도다.

하림은 이런 전라북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농도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회사였다. 연 매출 4400억원, 전국 닭가공의 30%를 점유하는 닭에 관한 한 전국 1등 회사였다. 닭을 잡거나 가공하거나 하는 분야에서 하림은 큰 손이었다. 전북 도내 480여 축산농가를 포함해 전국 700여 축산 농가에 2천만 마리의 닭을 위탁해 키운 뒤 이를 잡거나 가공해 팔아왔다.


이의 조업 정지는 타 시도로 치면 중소 공장 480개가 갑자기 판로 중단의 위기에 처한 것과 같다.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이 회사 회장 김홍국씨는 이제 나이 마흔 여섯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회사가 아니라 열서너살 중학생 때부터 집에서 닭을 키우다가 이 나이에 닭가공 1등 공장을 일군 사람이다.

그는 대학도 농과 대학을 나오고 대학 나온 뒤 지금까지 닭 하나로 사업을 해왔다. 언젠가 그는 나에게 3장 통합에 대해 일대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닭을 키우는 농장, 닭을 잡고 가공하는 공장, 이걸 내다 파는 시장까지 통합 운영해야만 우리 농업이 살고 농가가 산다며 자신은 그 일을 하는데 큰 머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공장이 불이 나 농장과 시장도 위기에 처했으니 어찌 할꼬 하는 걱정이 크게 다가왔다. 닭고기는 팔 길이 없어지면 다른 생물(生物)처럼 그냥 버려야 한다. 밭을 뒤엎어 수박, 배추를 묻는 것처럼 묻어야 한다. 수박은 그냥 썩지만 닭의 매장은 여러 가지 환경문제도 불러 일으킨다.

가장 큰 문제는 하림 공장 화재로 닭의 정상 유통체계가 무너진 데 있다. 출하기를 놓친 닭에게 하루하루 사료는 먹여야 하는데 생닭의 중간 유통업자, 도계업자, 도소매업자로 이어지는 유통 체계는 아직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업자가 닭을 사들여 다른 도계장에 넘기려 해도 구매자금, 수송 수단, 도계장, 판로 등을 확보하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문제는 닭은 45일 주기로 회전이 돼야만 가장 경제적이라는 점이다. 소나 돼지는 한두달 유통 체계가 무너져도 사료값을 감당하며 기다리면 살도 더 통통히 찌지만 닭은 이 주기가 딱 45일이다.

게다가 맘씨 나쁜 유통업자가 값을 후려치면 축산농가는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다. 전북의 양계 농가가 위기에 처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전북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국의 모든 양계 농가가 똑같이 출하 위기, 가격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수도권 시민 여러분 올 여름 삼계탕을 한 그릇 더 드십시오. 수요가 있으면 공급도 따라주는 법이므로 수도권이나 여타 대도시에서 삼계탕을 많이 먹으면 양계 농가는 숨통이 트입니다. 하림 공장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어딘가의 도계장에서는 닭을 잡을 것이고, 닭의 유통 체계는 급속히 회복될 것입니다.

농민이 살고, 양계 수입에 의존하는 여러 부대 산업이 살아납니다. 닭튀김, 양념 닭을 한 마리 더 먹어주는 것도 도와주는 길입니다. 지금부터 한여름까지 2천만 수도권 시민이 닭을 한 마리씩만 더 드시면 위기는 웬만큼 풀립니다. 정말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농업이 주 산업인 전라북도에서 전국의 양계농가를 대신해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