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독일인도 교포따라 시위에 참가"
광주 진압 '최초 규탄시위' 독일서 열려

독일교포 김정숙 여사 기증 자료서 밝혀져

등록 2003.05.16 13:47수정 2003.05.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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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뒤,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조직적인 규탄시위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것으로 확인됐다.

최초의 조직적 저항을 보여주는 '5·30 베를린 성토대회'에 관한 관련사료가 최근 확인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국내에서는 같은 날 서강대 김의기 열사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정기 금요기도회를 통해 광주의 진상을 알리려 했으나 대중적으로 결행되지 못하자 6층에서 투신한 것이 최초였다.

a 80년 5월 30일 하얀소복을 입은 교포들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베를린 중심가에서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80년 5월 30일 하얀소복을 입은 교포들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베를린 중심가에서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 같은 사실은 베를린 한인 세종학교 이사장인 김정숙(55·독일명 마크 그라프)씨가 최근 5·18기념재단에 당시 시위장면이 담긴 독일 현지 신문과 자료집, 지출내역서 등 관련자료 300여점을 기증해 오면서 알려지게 됐다.

김 이사장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부산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이민간 1세대이며 '한독친선회' 준비위원장을 맡으며 80년 5월 독일 교포사회의 반한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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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동포들의 애끓는 심정 생생히 담겨

이들 자료는 광주학살을 지켜보는 당시 독일 한인사회 동포들의 절박한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를 통틀어 학살사건이 미처 알려지기도 전인 80년 5월 30일 해외 동포에 의해 최초의 규탄 시위가 개최됐다는 점에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 언론은 철저히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던 상태에서 당시 고립된 광주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숨통은 국내가 아닌 해외 언론을 통해 터지기 시작했다.

80년 5월 광주학살이 시작된 뒤 독일(당시 서독) 현지 TV와 신문을 통해 광주소식을 접한 한인 동포들은 치를 떨어야 했다. 독일 카메라 기자들이 광주에 들어온 것은 5월 20일로 독일방송은 당시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의 각 장면들을 생생히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자료는 교포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함부르크 교회에서는 6월 1일 예배 후 시국에 관한 간담회를 나눴는데 그 중에서 조선대학교 민투위의 성명서는 심금을 울렸다. 60여명이 구국기도회에 참석했는데 교회 안은 눈시울로 가득했다."

튀빙겐, 슈투트가르트, 뉘른베르크와 뮌헨지역 교회에서는 5월 30일 특별 구국기도회를 시작으로 추도예배와 구국예배를 갖기도 했다. 또한 7월말까지 광주시민 돕기 특별헌금과 모금운동을 결의했다.


a 80년 7월 독일 재독한인교회 협의회 창간호. '광주학살의 잔인성'을 특집으로 다뤘다.

80년 7월 독일 재독한인교회 협의회 창간호. '광주학살의 잔인성'을 특집으로 다뤘다. ⓒ 이국언

라인마인 지방 한인교회는 26일 전 교우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31일 시가행진과 성토대회에 참가하는가 하면 피가 없어 죽어가는 광주시민들을 위해 45명이 헌혈에 나서기도 했다. 또 헌금 1만 마르크를 교회기관을 통해 광주로 송금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포들의 성원과 성금은 광주시민들의 투쟁 의지를 북돋는 데 더 없이 큰 역할을 했다.

한인교회는 개별적으로 갖고 있는 정보를 서로 나누고 동포들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가려진 진실을 알게 되고 용기를 얻어 시위에 나섰다.

가장 적극적이면서 활발하게 대응했던 곳은 서베를린이었다. 서베를린 한인교회에서는 25일 교우 긴급회를 열고 광주시민과 연대하기 위해 규탄시위를 갖기로 했다. '한독친선회'는 이때 결성됐다.

한독친선회, 광주상황 전하며 시위참여 호소

이 '한독친선회'는 독일인과 결혼한 한인여자와 부인회, 학생모임 및 간호사 등 70여명으로 구성됐는데 광주의 아픔을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들은 무세중, 서의옥, 오선희, 이무춘, 한영욱, 조종식씨를 주축으로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준비위원장은 김정숙씨가 맡았다.

이밖에 규탄시위와 관련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는데 규탄시위에는 27명이 찬성하고 6명이 반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메모에는 이 시위의 의의를 '각인의 무서움을 없애기 위해'라고 쓰여 있어 당시 절박한 상황에 처한 동포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가면을 쓰고 하자', '한복을 입자', '징이나 꽹과리 마이크 준비', '데모시 너무 흥분하지 말 것' '데모 후 영사관 방문' '카터 편지' 등 긴박한 상황에서 여러 투쟁형태들이 논의됐다.

당시 구호는 "서백림(서베를린) 동포는 광주 민주화 투쟁을 전폭 지지한다", "군은 민주 시민을 무차별 살해하지 말라", "반공투사 김대중 선생을 처형하지 말라", "미국은 한국 군사 독재를 지원하지 말라", "광주민주시민에 연대하는 베를린 한인은 총 궐기하자"였다.

5월 30일 베를린 시위, 광주 진압 후 최초로 터진 조직적 가두시위

5월 27일 새벽 끝내 전남도청이 함락되고 광주 시민들이 이성을 잃은 채 절망감에 쌓여 있던 5월 30일 마침내 베를린 중심가에서 성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5·18 이후 국내외에서 터진 최초의 조직적 시위이자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로 이어가는 대반전의 시작이었다.

이 최초의 베를린 시위에는 동포 500여명과 독일인 등 1천여명이 참가했다. 광주희생자를 위한 묵념을 시작으로 한 이날 시위는 광주사태 전말보고와 '우리의 소원' 합창, 격문과 구호 순서로 집회가 이어졌다.

a 80년 5월 30일 15명의 재독 한국유학생들의 단식투쟁을 보도한 독일 TAZ(타게스차이퉁). 하얀 소복을 입고 검정 어깨띠를 둘렀다.

80년 5월 30일 15명의 재독 한국유학생들의 단식투쟁을 보도한 독일 TAZ(타게스차이퉁). 하얀 소복을 입고 검정 어깨띠를 둘렀다. ⓒ 이국언

이들은 태극기를 선도하며 "군부독재 반대", "광주 민주화 투쟁 전폭 지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많은 독일인들이 흰 소복을 입고 거리에 나선 교포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또 기독교 대학생 모임의 집에서는 10여명의 재독 한국유학생들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역시 흰 소복에 어깨엔 검정 띠를 두르고 있었다.

독일의 한인사회는 모금운동을 위해 물품을 직접 만들어 바자회를 여는가 하면 의약품 보내기, 교민에 대한 편지 보내기 등을 통해 광주의 아픔과 함께 했다. 또 '찢어진 깃폭'이라는 단막극을 만들어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려냈다.

한미연합사 병력 사용 문제, 미국 책임론 전면에 제기

주목할 만한 것은 항쟁 당시 교민사회는 광주문제에 대해 예리하게 ㄲ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독 기독교 한인교회 협의회가 27일 발표한 '최근의 광주사태에 대한 우리의 결의'를 보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혈맹관계를 맺어온 미국이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한미연합군 사령부의 병력 사용에 동의했다는 것"이라며 미국의 책임을 전면에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독친선협회가 그해 6월경 베를린 동포에게 보낸 시위참가 '호소문'은 한인동포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호소문은 정부가 광주시민들을 '좌경폭도'로 매도하고 있는 데 대해 논리적으로 정연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세인식은 당시 이응로, 윤이상, 송두율 등 유신체제를 반대해오던 진보적 지식인들이 한인사회에서 정신적 지주역할로 자리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며 그 동안 이념적으로 서로 나뉘어져 있던 교민들은 하나로 결집하게 되었다. 5·18을 통해 이른바 독일 내 제 단체들간 '좌우합작', '지역연합'이라고 일컬어지는 '민주연합회'가 탄생한 것이다.

교민사회 광주항쟁 이후 하나로 결집돼

교민사회가 이렇게 통합해 가자 영사관에서는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비판적으로 돌아선 한인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광복 축제'을 열고 '연예인의 밤'을 개최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한인 동포들은 "불의의 권력 앞에서의 굴종과 비겁에서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해방하자"며 쾰른에서 가두시위를 개최하고 있었다.

자료는 이밖에도 교민들이 낸 후원금 내역과 한독친선회 지출내역서, 우편물 발송 영수증까지 동포들의 땀이 배인 자료를 통해 당시 광주의 아픔을 함께 지려는 동포들의 애절한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당시 이러한 5월 투쟁은 독일 교민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5월 민중제'라는 이름으로 그때의 정신이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

안종철(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국장)씨는 "당시 국내에서는 삼엄한 공포분위기와 절망감으로 30일 서강대 김의기 열사가 항의 투신한 것이 처음인데 광주가 진압된 직후 곧바로 (조직적) 투쟁이 조직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했다. 또 "영사관의 감시 속에 있었던 교민사회가 5·18을 계기로 통합되게 되는 발단이 됐다는 것은 5·18항쟁이 분열된 해외 교민사회의 통합에도 기여했다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80년 6월 한독친선협회의 시위참가 호소문

친애하는 재 백림 한국인 동포 여러분!

지금 우리의 그리운 고국산천에도 벌써 뜨거운 여름이 찾아 왔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타향의 낯선 언어와 풍습에 시달리면서도 우리는 결코 구수한 인정이 때묻은 골목길들과 밥짓는 저녁연기 고요히 피어오르는 내 고향산천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또한 수 만리 떨어진 이역에서나마 조국의 발전과 민주화를 얼마나 간절히 기원해 왔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최근, 피를 같이 나눈 동족에게 가해진 광주의 무자비한 살상행위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와 치욕으로 가슴을 떨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비록 단식투쟁과 데모에 참가하지 못하신 분들도 아마, 공수부대의 잔인한 총칼에 쓰러진 어린 소녀와 학생들의 시체가 담긴 사진보도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조선대학생의 성명서와 목격자의 눈물어린 증언을 읽어가면서 남몰래 눈물지은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불법적인 군부는 광주에서의 처절한 열흘간의 민주화투쟁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 폭동'이라고 거짓 선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4·19 학생혁명을 기억합니다. 경찰의 총탄에 쓰러진 젊은 학생들의 피에 젖은 호주머니 속에, 그것도 시간이 급해 인쇄조차 하지 못한 채 잉크로 휘갈겨 쓴 붉은 삐라를 몰래 집어넣고는, 정부는 학생들의 의로운 민주화 투쟁을 역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니 조종이니 하고 거짓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허위라는 것은 이내 밝혀졌습니다.

왜 우리 땅에서는 조그만 반정부적인 사건만 발생해도 그것을 다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고 속이고 있습니까?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하의 20여년 동안 우리는 얼마나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왔습니까?

그러나 광주의 20여만 시민들이 공산주의자 한 둘의 조종으로 그런 '폭동'을 일으켰다면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신의 귀한 생명까지 분연히 내던지며 민주화 투쟁대열에 앞장섰던 광주의 그 시민과 학생들은 다 죽음에 대한 판단력조차 없는 정신병자라는 말입니까?

정부는 또한 항상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북한의 남침위협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예비군이 창설되고 방위성금까지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북한이 지금이라도 당장 남침해 올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위기 상황에서 그것도 휴전선에 배치된 군대들까지 서울로 빼돌려, 작년 12월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으며, 또한 휴전선에서 불과 25㎞밖에 떨어지지 않은 수도 서울에 연일 고층빌딩이 들어설 수가 있겠습니까? 북한이 남침하면 당장 잿더미로 변할텐데 말입니다.

동포 여러분!

정부의 이러한 허위선전에 무비판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우리들은 이 남의 땅에까지 와서 '빨갱이'니 하는 서글픈 언동으로 동족간의 따스한 인정과 우애에 생채기를 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정부의 그릇된 처사를 비판하나고 해서 빨갱이로 몰아버린다면, 우리는 그럼 그냥 정부가 무슨 짓을 하든, 수 천명의 동족을 6·25때의 인민군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든 말든 침묵만 지켜야 하겠습니까?
내 형제와 친구가 저 살인마와 다를 바 없는 전두환의 미친 총칼에 피 흘리며, 피 흘리며 쓰러져 가는데도 우리는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어야 합니까?

여러분! 저 독일인들의 손가락질이 보이지 않습니까? 자유와 민주를 위해 국내에서는 동족이 피 흘리며 싸우는데도 우리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안락과 무사태평만 즐기고 있다고 비난하는 저 조소에 찬 손가락질이 말입니다.

동포여러분!

광주시민의 눈물겨운 투쟁에 같은 동포로서 조금이라도 연대하는 심정으로 일어선 우리들은, 단식 투쟁과 데모를 거쳐 지난 6월 4일∼6월 8일간 개최된 '독일 카톨릭의 날'에 즈음하여 '전두환 퇴진', '정치범 석방' 및 '민주화'의 요구를 내걸고 불과 사흘 동안에 만 여명이 넘게 서명운동을 성공리에 끝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와 피를 달리하는 이국인조차 얼마나 광주사태의 잔인성에 분노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뜨거운 공감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광주사태로 인하여 희생된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위한 모금운동과 또한 국내의 투쟁과 탄압상에 관한 소상한 정보를 수집하여 널리 알림으로써 국제적인 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홍보활동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로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태로운 현실을 직시하여 재독 한국인 동포 여러분의 민주화 운동에의 열렬한 동참과 성원을 호소하여 마지 않습니다. 건투를 기원합니다.

1980년 6월 한독친선협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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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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