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우리 독립전사들의 터전이었던 만주 벌판, 온통 옥수수밭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졌다. 겨울철에는 눈 덮인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다고 한다.박도
통일 후 항일투쟁사를 다시 써야 함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허 기사는 자꾸만 곰 사육장에 들러 가자고 했다. 그곳에는 입장료도 없을 뿐더러 그냥 부담 없이 눈으로 잠깐 구경만 하라고 권했다.
오전에 두만강에 들러 나올 때도 그가 사슴농장에 차를 세우려는 걸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치게 했는데, 두 번이나 그의 청을 거절하기에는 그동안 친절이 무척 부담이 됐다.
바쁜 일정으로 기사에게 점심 식사도 대접하지 못해 미안한 감도 있어서 나는 봉사료로 50원을 더 주겠다고 달래면서 우리 속담 하나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 사람이 번다’라는 게 있어요.”
눈치 빠른 허 기사는 내 말을 새겨들었는지 속담이 재미있다고 껄껄 웃고는 더 이상 곰 사육장에 들리겠다고 보채지를 않았다. 그는 나와 이 선생을 돈 많은 유람객으로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곰 사육장에 들렸다온 사람들에 따르면, 이곳에는 백두산과 흑룡강성 일대에서 잡아온 100여 마리의 곰을 철책 우리에다 인공 사육하면서 관광객이 보는 가운데 웅담을 꺼내서 판매하는 모양이다.
웅담 제조업자들은 살아있는 곰을 철책에 가두어놓고 심지어 살아있는 곰의 쓸개에다 호스를 연결시켜서 흘러나오는 담즙까지 즉석에서 받아 판매한다고 한다.
아무리 곰의 쓸개가 정력 강장에 신통한 효험이 있다지만 어디 양식 있는 사람이 할 짓인가? 사람은 저만 살겠다고 이런 동물 학대 행위를 해도 되는 건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잔악한 짓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지르고서도 하나님을, 부처님을 찾는다. 태초에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이런 잔악한 짓도 허용하셨는지?
점심 식사시간까지 아끼면서 두만강·용정 일대를 서둘러 다녀왔건만, 약속 시간 3시를 조금 넘어서야 빈관에 도착했다. 다행히 약속한 손님이 30분 늦게 오겠다는 연락이 와서 그 틈에 온종일 뒤집어 쓴 먼지를 닦을 수 있었다.
3시 30분, 연변대학 부설 민족연구소 소장인 박창욱 교수가 오셨다. 이분은 동북지역 독립운동사의 대가다. 나는 초면이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인 김중생 이항증 두 분과는 구면으로 정담을 나눴다.
박 교수는 역사학자답게 요즘 젊은이들이 ‘역사를 너무 모르는 게 유감’이라는 말머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으로 민족 정기란 거창한 게 아니라, 바로 자기 핏줄을 아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모름지기 민족에 대한 자호감(自豪感 :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말함)이 있어야만 젊은이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운다면서, 조상들의 투쟁사를 후세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책임은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기성 세대에 있다고, 당신 책임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변의 역사학자 중심으로 지난날의 역사를 정리하여 <역사 발자취 총서>를 펴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얕은 지식으로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무장 항일 투쟁이 침체된 듯하다고 질문을 드렸다.
박 교수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세운 후부터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삼광(三光) 작전'이란 이름으로 일제 침략자들이 항일단체에 대하여 감행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독립투사 중 일부는 지하로 숨거나 상해로, 또는 본국으로 잠입했다.
또 몇몇은 일제에 투항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독립투사들은 항일의 한 방법으로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끝까지 일제와 싸웠고, 또 다른 많은 부류는 빨치산, 곧 항일 반만(抗日反滿 : 일제에 항거하고 괴뢰 만주국에 반대함) 유격대로서 눈부신 공을 세우며 오히려 중국 인민보다 해방 때까지 더 줄기차게 일제에 투쟁했다고 한다.
다만 그동안 조국이 분단되어 냉전 체제로 좌익 계열의 독립운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왜곡해서 그 기간이 남조선 독립운동사에는 공백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시 공산당에 들어간 사람의 대다수는 어디까지나 항일의 한 방법으로 중국공산당을 선택했거나,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처럼 번진 ML(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휩쓸린 탓이지, 애초부터 무슨 대단한 이념으로 입당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1943년 모택동 주석이 중국의 소수 민족에게도 해방이 되면 땅과 자치권을 준다는 데 고무되어 더욱 열성적으로 항일투쟁을 했다면서, 해방 후 냉전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사를 봐서는 안 된다고 박 교수는 여러 차례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