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잎 갉아먹고 있는 누에대한잠사협회
누에치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되짚으며
춘궁기에 돈을 만져볼 방법은 고사리 꺾는 일이 있지만 목돈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가욋돈이 생겼다고 보는 게 맞다. 식구가 최대로 늘어난 1970년대 중반 농사짓는 집 치고 보리농사, 벼농사를 주로 하는 2모작을 하지 않은 집이 없었고 잠시 틈만 있으면 삼베의 재료인 대마(大麻)를 재배하여 길쌈하고, 누에치는 양잠(養蠶)하고, 겨울에는 땔나무를 해와서 한 구루마 씩 내다 팔아 1년 내내 농한기가 거의 없게 지내야만 대가족이 입에 풀칠이라도 해서 연명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많아 ‘뭐 하려고 그리 많이 낳았어요?’라는 말이 가가호호(家家戶戶) 나오지 않는 집이 없게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마는?
하여튼 1976년 누에고치의 생산량은 유사이래 최고 치인 4.2만 톤에 이르렀다가 1994년 이후에는 1천 톤 미만으로 급격히 줄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막 다니기 시작하던 때 이미 지게를 지고 다닌 경력이 2~3년은 되었으니 농사짓는 것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분양 받아 온 누에가 스무날 가량이면 다 커버리니 못자리 할 시기와 맞물려 한 동안은 허리가 휘어진다. 며칠 지나면 보리 베어 타작을 해내야 하고 모내기를 해야하니 ‘바쁘다’는 말로 설명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날이 흐리나 비가 오나 맑으나 뽕을 따다 하루 서너 차례에서 대여섯 번은 줘야하니 남녀노소 식구들이 모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급할 때는 (*1)‘놉’까지 얻어다 써야 했다.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은 지게를 지고 가서 뽕나무 가지를 낫으로 툭 잘라서 하루 서너 번 한 짐 씩 지고 와야 했고, 어머니와 누이는 부대자루를 들고 가서 차곡차곡 눌러 뽕잎을 가득 따서 담아 이고 와야 한다.
갓 깨어난 까만 개미누에가 드글드글 모여 있는 모습은 벌레들의 야단법석 그 자체다. 누에치기는 그 작고 여린 누에가 깨어나면 본격 시작된다. 어린 뽕잎을 자그맣게 잘라 조그만 상자, 요람에서 열과 성을 다하여 기르다가 몸집이 커짐에 따라 급격히 불어난 누에를 방마다 양쪽으로 3층집을 지어 공간을 넉넉하게 하여 20여 일 기르면 8cm 크기의 가운데 손가락 길이 만큼 되는 큼지막한 참깨 벌레 정도의 곤충이 뽕잎 먹기를 그치고 누렇게 된다.
몸 속에 들어있는 파란 누에똥까지 들여다보이게 투명해지면 약간은 습한 실을 입으로 슬슬 뱉어내는지 밀어내는지 모르지만 한 올 한 올 뽑아 거미줄 치듯 시작하여 이틀이 안되어 어느새 하얗게 제 집을 지어 고치 속에 들어가 안주(安住)한다. 한 짬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입을 놀려 집 짓는 품새를 한참 골똘히 지켜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매 날이 되어 1등급 맞아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는 ‘오지다’며 입이 함지박만 하게 턱 벌어졌다.
누에치기는 40대 쯤 되는 아저씨들에게는 한 민족에게 무수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선사했다. 어머니의 허리가 휘고 아버지는 물꼬 보느라 쉴 틈도 없었다. 어린 우리들은 ‘오디’ 하나 따먹는 재미로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누에치기 양잠은 나에게도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