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꼬실라' 먹던 어렸을 적 산골추억

[어릴적 허기를 달래주던 먹을거리-6 ] 보리

등록 2003.05.22 01:12수정 2003.05.2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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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익어가는 보리. 우포늪이 있는 경남 창녕일대는 보리밭, 마늘밭, 양파밭이 즐비합니다. 역시 부지런 하시더군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 우포늪이 있는 경남 창녕일대는 보리밭, 마늘밭, 양파밭이 즐비합니다. 역시 부지런 하시더군요.김규환

남녘 들판은 두 번 황금빛으로 출렁


가을 들판이 황금물결을 이뤄 나락을 베고나면 ‘독새기’가 나기 전에 쟁기로 “이랴!” “엇야!” “워-워-” “자랴!”를 외치며 서둘러 논을 갈아엎어 보리 파종을 한다. 차령이남 지역이 보리 심어 이듬해 초여름에 일찍 베어내고 모내기를 할 수 있는 2모작 지역인데, 건조한 영남은 겉보리를 심고, 서쪽 습한 호남은 쌀보리를 주로 심었다.

쌀보리와 겉보리의 차이는 눈으로 보아 겉보리가 더 날렵하고 길쭉하며 까시락도 길다는 것만 알 뿐 더 알지를 못한다. 보리밭 2할은 밀로 채워졌던 70년대. 망종으로 치닫던 초여름 남녘 들판은 고향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런 풍경을 20년 전까지만 해도 쉽게 볼 수 있었다.

3월에 찍은 보리싹. 이 때 된장국 끓여도 맛있고, 홍어에 넣어서 홍어앳국 끓여도 맛있습니다. 다만 밭 매기 힘겹지요.
3월에 찍은 보리싹. 이 때 된장국 끓여도 맛있고, 홍어에 넣어서 홍어앳국 끓여도 맛있습니다. 다만 밭 매기 힘겹지요.김규환

겨울을 이겨낸 보리

흙먼지를 마셔가며 손이 부르트도록 괭이나 쇠스랑으로 흙덩이를 두들겨 깨서 고랑 하나하나 뿌린 보리 씨앗을 간신히 덮어주면 열흘쯤 후에 귀여운 싹을 틔워 파릇파릇 돋아난다. 하지만 곧 찬바람에 겉흙이 얼면 노출된 가녀린 싹이 대부분 꼬실라져 누렇게 타서 죽은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땅 속에서 겨우내 제 몸을 보전하였다가 날이 풀릴 즈음 온 가족이 합심하여 밟아주면 서릿발을 이겨내 튼튼히 뿌리를 박아 훈훈한 봄바람을 맞고 부활하였다. 쑥국에 보릿국 끓여 먹기 참 좋게 자란다. 파릇파릇 들판을 녹색으로 바꿔 놓으니 눈을 즐겁게도 한다.


보리밭 주인 노릇하던 세 가지 잡초-볼태기, 독새기, 보지감자

보리밭 매 본 사람은 볼태기 넝쿨 뜯어 나오던 시절이 그리울 겁니다. 밥에 볼태기 무던히도 들어 있었지요?
보리밭 매 본 사람은 볼태기 넝쿨 뜯어 나오던 시절이 그리울 겁니다. 밥에 볼태기 무던히도 들어 있었지요?김규환
보리밭에는 봄에 나는 풀이 몇 가지 있다. 그 웬수 같은 대표적인 잡초들은 ‘볼태기’, ‘독새기’, ‘보지감자’(뿌리 생김새가 그러했으니 그렇게 불렀으리라)로 불렸던 성가신 존재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았던 시기에 독새기는 보리와 키가 거의 비슷하게 경쟁하듯 자라 주인인 보리가 자라는 걸 방해하지만 그걸로 끝이었고, ‘보지감자’라 불렀던 좀생이 감자는 어린 보리 싹에게 지장을 줄 정도만 방해하는 데 그쳤다.






독새기는 잘 자라면 보리만큼 크지만 씨는 작아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심이니까 매 줘야했지요. 좌우가 다 징그럽습니다.
독새기는 잘 자라면 보리만큼 크지만 씨는 작아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심이니까 매 줘야했지요. 좌우가 다 징그럽습니다.김규환
하지만 ‘볼태기’는 전혀 다르다. 어느 날 비료를 뿌리고 찾아가 보면 보리를 감아 타고 올라 팬 보리를 못살게 구는 것도 모자라 보리타작을 마쳐 널어놓아도 들깨알만한 크기의 까맣고 깨지지도 않는 알맹이를 무수히 쏟아낸다.

어디 그뿐인가? 보리쌀을 찧어도 보리쌀에 까만 씨가 남아서 웬만큼 조리로 일어도 걸러내기 힘들고 밥을 해놓아도 퍼지지도 않는 세상 귀찮은 놈이다. 누가 말했듯이 제거 대상인 것이다. 이놈 그냥 놔뒀다가는 명년(明年)이고 저 명년(명년 다음해이니 2년 후)인들 등외 품 맞기 쉽상이다.



보리가 이렇게 멋드러지게 팼습니다. 전남 담양 호남고속도로 공사 중인곳에서. 이것만 쌀보리 입니다.
보리가 이렇게 멋드러지게 팼습니다. 전남 담양 호남고속도로 공사 중인곳에서. 이것만 쌀보리 입니다.김규환

보리피리 만들어 불다보면 어느새 보리 배가 불러와 패기 시작

이런 대표 잡초꾼들의 방해를 견뎌내면 다행이다. 보리 키가 아이만 해지면 보릿대 하나 쑥 뽑아 매듭을 한 개 붙여 잘라 줄기 따라 날카로운 칼집 조금 내서 달작지근한 맛을 다시며 삼키고는 “부우~ 부부” 불어주면 꽤 좋은 보리피리가 만들어졌다.

얼마 안가 보리 배통아지가 배 불러오면 보리가 패기 시작한다. 잔뜩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다. 그 때가 소만(小滿) 직전이니 사나흘 지내면 쭈글쭈글 하던 보리 알에 뜨물이 차고 오동통통 까만 줄 그어진 알맹이를 싸고 있는 보리 까시락도 쭈뼛쭈뼛 제 자랑을 하듯 하지만 힘없기는 마찬가지다.

보리가 익어가면 마음이 바빠지는 건 어른들이고 아이들은 보리 꼬실라 먹을 때가 되니 날아가게 좋았습니다.
보리가 익어가면 마음이 바빠지는 건 어른들이고 아이들은 보리 꼬실라 먹을 때가 되니 날아가게 좋았습니다.김규환

동네꼬마녀석들 꼴 베는 건 뒷전, 보리꼬실라 먹는데 정신 팔려

푸른 기운이 조금 남아 있고 보리 껍질이 붉은 기운이 도는 무지개 빛일 때면 우린 꼴 베러 갈 때 반드시 ‘비사표’ 사각 통 성냥 집 한 쪽을 뜯고 성냥 골을 대여섯 개 챙겼다. 행여 꼴 베다 물에 젖을까봐 많지도 않았던 종이에 조심스레 꼬깃꼬깃 싸서 윗 주머니에 넣어 옷핀을 찔러 빠져나오지 않게 해서 나간다.

보리를 혼자서 먹다가 무슨 날벼락을 맞을 지도 모르는 터라 두셋이 한 짝이 되어 석 줌 정도 베어 온다. 나머지 사람은 밖에서 망을 양쪽으로 봐야 한다. 그렇다고 논 가에서 베어서는 절대 안 된다. 베다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베어 나오면 그 많은 보리밭 어디서 베었는지 모르는 까닭에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게 보리 서리다.

그 때 누가 오는가를 지켜보던 아이들은 냇가에 말라 비틀어져 걸려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모으고 나뭇잎을 긁어모아 꼬실라 구워 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게 중 한 명이 보리를 베어 나와 “야! 일로 와봐라잉~”하자, “알았당께”하면서 모여들었다.

“근디 얌마 많이도 벼 왔다. 언제 다 꼬실라 묵을라고 그냐?”
간댕이가 가장 작다는 아이가 말했다.
“개새꺄 묵다 냉기믄 깔망태다 넣어각고 가믄 되고, 묵다 걸리면 몇 대 맞아불면 되제 설마 죽이기 까지 하건냐? 뭐시 문제간디 그려?”
“씨벌롬아 글도 양심이 있제 이것이 뭐시냐?”
“야 색꺄? 피장파장이잖어? 이왕 먹을 꺼 몽땅 먹고 맞는 게 낳제 쥐꼬리맹키 쬐까 묵다 걸리면 억울하지도 안냐?”

한 아이가 분위기 정리를 했다.
“아따 쌕끼들아! 그만 허고 얼렁 꼬실라 묵자.”

보리 이삭보다 더 긴 보리 까시락, 까스락. 불에 올리면 싸르르 타버리고 말지요. 요것이 타작할 땐 사람 반 죽입니다.
보리 이삭보다 더 긴 보리 까시락, 까스락. 불에 올리면 싸르르 타버리고 말지요. 요것이 타작할 땐 사람 반 죽입니다.김규환

애벌 굽고 사그라진 불 위에서 마저 구우면 누르스름 맛있게 구워져

불쏘시개에 먼저 불을 붙이고 나뭇가지를 집어넣으니 금방 불이 연기도 내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한 움큼 베어온 보리 한 줌씩을 널찍하게 펴서 밑둥과 줄기를 잡고 불에 이삭을 갖다댄다. 줄기는 아직 누렇지도 않다. 물기 탱탱 슬어있어 죽지 않은 상태다.

“타닥타닥” 소리가 귀를 “띵~”하게 하고 고소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아따 고로코롬 막 갖다 대불면 다 타불제~”
“한삐짝으로 떨어져서 찬찬히 구워야제 고로코롬 하믄 쓰것냐?”
“요렇게야?”
“잉~.”

보리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느긋하게 조금씩 굽다가 모가지가 떨어질 즈음 애벌 구워지면 한꺼번에 불구덩이에 모아서 뜸을 들이듯 더 익히면 겉껍질만 타지 속까지는 타지 않았다.

눈치 3단쯤 되고 매번 잽싼 아이 한 명이 사그라진 불 위에서 까맣게 잘 익은 보리 이삭 다섯 개를 나무 막가지로 “툭툭, 틱틱” 끄집어내 손에 올려놓고는 “후~후-훗!” 불며 댄다. 뜨끈뜨끈한 보리를 손에 올려 양손 사이에 넣고 몇 번 비벼 대기 시작했다.

“후후~”
“후~”

입을 가지런히 모으고 손도 식힐 겸 타다 남은 까시락과 보리 껍질을 불어준다. 이러기를 대여섯 번 하고 나니 겉이 까맣게 탄 것,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것, 누르스름하게 적당히 익은 보리알갱이가 손에 가득하다. 검불을 마저 불어내고 입으로 가져다가 입술에 뺨을 때리듯 “턱!” 하고 털어 넣는다. 몇 번 씹더니,

“야! 참말로 맛있다. 얼렁 묵어봐야~”
“의리 지독히 없는 놈 같으니... 너 거시기 아부지 한테 일러분다잉~.”
“긍께 얼렁 한 번 비벼서 묵어보랑께!”

이때는 들로 나갈 때마다 보리 꼬실라 먹느라 정신 없었다.

창녕 우포늡 가는 길 가 보리밭에는 깜부기가 제법 많았습니다. 깜부기가 곰팡이인가 봅니다. 소독을 하지 않았으니 공해에 덜 찌들었겠지요?
창녕 우포늡 가는 길 가 보리밭에는 깜부기가 제법 많았습니다. 깜부기가 곰팡이인가 봅니다. 소독을 하지 않았으니 공해에 덜 찌들었겠지요?김규환

서로 쳐다보고 '깜둥이가 따로 없다'며 "히히히히" 웃어대던 천진난만한 아이들

서로를 가리키며 한마디씩 한다.

“얌마! 니 몰골이 그게 뭐냐?”
“남 말하고 하고 있네. 지비 얼굴이나 한 번 보셔.”
“정말 못 봐주겄다. 깜둥이가 따로 없구만.”

“히히히히”
서로의 까만 얼굴과 하얀 이(齒)를 쳐다보며 배꼽 잡고 웃었다.

보리를 먹자마자 가까운 냇가로 가서 입술을 이리저리 문질러대며 씻었다. 하지만 이미 숯검정이 묻었으니 비누칠을 하지 않으면 지지 않을 모양이다. 모래로 문질러 보고 쑥을 뜯어 문대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젠 누구네 보리를 베어다 먹었든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늘따라 같은 마을 친구들 이름을 한 번 부르고 싶다. 정육남, 김승호, 이병문, 양해섭, 유병섭, 유병주, 양형근, 양해자, 정수연, 강양임, 조순자, 마영희, 장영임, 정연님.

창녕 부곡 하와이 가는 길에 익어가는 보리
창녕 부곡 하와이 가는 길에 익어가는 보리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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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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