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손마디에 감추기 힘든 고집스러움이

[이철영의 전라도기행6] 보성 미력옹기

등록 2003.05.23 16:08수정 2003.06.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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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외갓집에 간다는 것은 집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는 가슴 설렌 일이었다.

“오메 내 강아지, 내 새끼 오냐”하시며 연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외할머니 앞에서 나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던 얻을 수 있는 왕자나 다름없었다.


수래질 하고 있는 이학수씨. 오른손에 수래를, 왼손에는 도개를 잡고 그릇벽을 두들겨 다짐.
수래질 하고 있는 이학수씨. 오른손에 수래를, 왼손에는 도개를 잡고 그릇벽을 두들겨 다짐.오창석
할머니의 사랑은 내 키보다 더 컸던 항아리에서도 나왔다. 입이 궁금하다 싶으면 거기에서는 할머니의 손을 따라 곶감, 강정, 부각, 알사탕 같은 것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왔는데 그 곳은 나를 위해 마련해 둔, 깊이를 알 수 없는 보물창고였다.

장독대는 철에 따라 봉숭아, 채송화, 맨드라미, 민들래, 접시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나만의 정원이었고, 겨울이면 추운 장독들 위에 쌓인 눈을 바라보다가 어린 마음에도 까닭 없는 슬픔에 가슴이 아려오곤 했다. 그리고 눈 들어보면 낮은 담장을 넘어 앞산에는 내 가슴에 곧 스며들 것만 같은 물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고 그날들은 다시 돌아 올 수 없지만 돌이켜보면 할머니께서 마련해 주신 내 인생의 가장 안온하고 행복했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그 시절의 풍경에는 이처럼 옹기와 장독대가 빠지지 않았다. 지금은 냉장고에 밀려나 아파트 베란다의 좁은 구석이나 차지하고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전남 보성의 진짜 옹기장이 이학수(48)씨는 추억의 저편으로 스러져가고 있는 옹기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고 있다.

벽에 세워 놓은 항아리들이 이쁘게 궁둥이을 내밀고 선 처녀들 같다. 호텐토트족 처녀.
벽에 세워 놓은 항아리들이 이쁘게 궁둥이을 내밀고 선 처녀들 같다. 호텐토트족 처녀.오창석
9대 째 300여년을 이어 내려온 그의 가업은 선대(先代)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의 방식으로 옹기를 만들어 낸다. 그는 아직도 직접 물레를 발로 돌려 그릇을 빚고 약토(부엽토)와 재를 섞은 전통의 유약을 발라 굽는다.


그는 “많이들 전동물레를 쓰지만 발로 돌리면서 완급을 조절해야지 모터로 돌려버리면 원하는 데로 안 나오지요”라고 말한다.

특히 일제시대 박래품이 들어온 때부터 우리의 그릇에는 거의 모두 납산화물이나 망간을 섞어 쓴 '광명단'이라는 번쩍거리는 유약을 바르게 되어 그것의 생명인 '숨구멍'을 막아 버렸는데, 그는 질식해 버린옹기에 새 숨을 불어넣어 되살려 놓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옹기에 곡물을 담아 놓으면 신선한 맛이 오래도록 유지되며, 꽃을 꽂아 놓아도 유리나 사기 화병에 비해 몇 배 더 수명이 오래 간다고 한다.

어항 삼아 금붕어를 놓아길러도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은 옹기가 이런 생물들이 나고 자라는 바탕인 흙과 가장 유사한 환경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백년 이어 내려 온 가업이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농공상’을 찾는 봉건적 인습이 엄존한 시대를 산 부친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만은 우대받는‘출세’의 길을 걷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잘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옹기장이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부친(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96호, 이옥동 옹, 94년 작고)과 6개월여를 씨름하다가 결국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그에게 옹기 일을 허락하고 말았다.

미력옹기 전시장 뒷편에 있는 전통 가마. 25~30도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불길이 자연스럽게 퍼지게 하는 구조. ‘뺄불통가마’로 부름.
미력옹기 전시장 뒷편에 있는 전통 가마. 25~30도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불길이 자연스럽게 퍼지게 하는 구조. ‘뺄불통가마’로 부름.오창석
“피는 거스를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물레대장들은 수래질(그릇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안쪽에 도개를 받치고 밖에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과정) 할 때 나는 텅텅거리는 공명음에 취해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해요. 일종의 중독 같은 것이지요.”

그는 자신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중독을 말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부드러움 속에는 춤꾼 같은 자유분방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스쳐 가는 날카로운 눈매와 거친 손마디에선 감추기 힘든 고집스러움도 배어있다. 선대의 삶이 살아 남기 위한 숙명의 선택이었다면 그에게는 타고난 예술적 열정에 더하여, 선대의 삶을 극복한 투사의 이미지도 함께 한다. 옹기로는 만들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

밥그릇, 다기, 떡시루, 등잔, 쌀독, 의자, 탁자, 굴뚝 등의 일상생활도구에서부터 고대로 올라가면 옹관묘에 쓰이는 관까지 만들었으니 플라스틱과 금속의 일반화 이전 시기는‘옹기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공방이 있는 보성군 미력면의 '미력옹기’에는 전시장과 아울러 체험학습장까지 갖춰져 있다. 값도 시중의 자기나 유리그릇에 비해 비싸지 않고 가족과 함께 방문하여 직접 만들어 가져갈 수도 있다.

항아리에 물을 담아 키운 수련. 옹기로 된 항아리나 꽃병은 그 자체가 숨쉬는 땅과 같아 식물의 생존과 성장에 알맞다(왼쪽)/말리고 있는 항아리들(오른쪽).
항아리에 물을 담아 키운 수련. 옹기로 된 항아리나 꽃병은 그 자체가 숨쉬는 땅과 같아 식물의 생존과 성장에 알맞다(왼쪽)/말리고 있는 항아리들(오른쪽).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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