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바위와 석탑. 거대한 원판형의 돌7기가 북두칠성의 배치와 같이 놓여 있고 돌의 크기 또한 별의 밝기와 유사함. 탑을 세우기 위해 깎았다가 세우지 못하였다는 설도 있음.오창석
그런 만큼 건립시기도 분명치 않아 9세기 말-10세기 초(도선 창건설) 외에도 11세기, 12세기 건립설 등 이견이 많다. 누가 지었는가 하는 창건 주체에 대해서도 도선설 외에 통일신라 말 이곳을 지배했던 지방 호족세력, 미륵의 혁명사상에 따라 미륵공동체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천민계층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와불을 바닥으로부터 떼어내려다 만 흔적이며 절 안에 봉안하지 않고 계곡과 산등성이에 무리지어 있는 석불, 그리고 많은 석탑들은 너무도 형식이 독특하여 어느 시대 어떤 양식의 흐름 속에 있는지 연관성을 따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처럼 일정한 시대적 양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이유는 대체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현저히 약화된 고려중기 이후 집권세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세력들의 소산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시대적으로 어긋난 감은 있으나 작가 황석영이 그의 소설 '장길산'의 말미에서 관군에 대패한 '길산'이 천민, 노비들과 함께 새 세상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장소로 그려낸 것처럼 이곳의 석탑과 불상들은 미완과 파격적 형식으로 말미암아 온갖 상상과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 되어 있다.
운주사 일대에선 일반 사찰에서 느끼는 엄숙함, 정연함을 찾아 볼 수 없다. 균형이 맞지 않은 눈, 코, 귀, 손, 발은 혹시나 시한에 쫓겨 대충 만들어낸 불량품이 아닐까 하는 불경한 추측이 들만큼 조잡한 구석이 많다.
정상적인 부처님이라면 적어도 일체의 만상을 품에 안은 넉넉하고 인자한 모습이어야 할진대 쪼그라진 옆집 할메나 힘센 놈에게 두들겨 맞아 풀이 죽은 어린아이, 어떤 불상은 압제에 대항해 제몸을 불사른 베트남 승려의 타다 남은 몸뚱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땅속에서 불쑥 솟아올라 머리만 남은 불상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반항하다가 목을 잘린 힘없는 민초의 슬픈 얼굴이거나 아니면, 새 세상의 도래를 기원하며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날이 오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망치질을 하던 석공이 결국 원했던 미륵은 실현하지 못하고 눈물에 범벅된 자화상을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