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당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김문수의 과거를 회상하며…

등록 2003.05.29 15:28수정 2003.05.2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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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한 때는 노조위원장이었고 한 때는 대한민국 전역에서 그 이름 아래 무릎 꿇게 했던, 나의 인생을 바꾸어 주었던 청계 피복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한 김문수, 그는 과연 누구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김문수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받들어 총을 하건 아니면 겨눠 총을 하건 관심없다. 나의 머리 속에서는 그저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 떠오를 뿐이다.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1971년 10월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관련 제적 / 1974년 4월 민청학련관련 제적 /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 1985년 2월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1986년 5월 인천 5·3직선제개헌투쟁으로 구속 (2년 6월) / 1992년 10월부터 1994년 6월 노동인권회관 소장 / 1990년 9월 민중당 구로갑지구당위원장 / 1990년 11월 민중당 노동위원장.

그런데 갑자기 그는 1993년 한국노동연구원 현대그룹 노사관계진단 현대자동차팀장이 되었고 1994년 6월에는 노동인권회관 이사, 1995년 3월에는 신한국당 중앙당 기획조정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1996년 4월에는 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 경기부천소사)이 되었고 1997년 11월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90년대 초반의 사회적 분위기는 남서풍이 아니라 북동풍에 의해서 냉각되었다. 소비에트의 붕괴와 중국의 시장사회주의 정책의 확대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의 줄 이은 도산과 피폐함이 그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과 당시의 민중당 지도부의 일부 그리고 이들을 따르던 학생과 활동가들 모두가 비슷하게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부인하거나 외면하거나 포기했다. 그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김문수 의원은 1991년 당시 <사회와 사상>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은 역사적 필연법칙을 설파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역사에서 마지막 적대적 생산형태로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노자간의 계급모순은 심화되어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고, 그동안 계급투쟁으로 단련된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해 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론은 자본주의의 모순 해결 능력을 극단적으로 과소평가하거나, 자본주의의 앞날에는 절대로 활로가 없고 사멸뿐이라는 결정론적 경향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 전개를 필연적 법칙으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의 생각은 서구의 전통적 형이상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결정론, 붕괴론은 그동안 자본주의의 역사와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 현대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엄연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오류임이 증명되고 있다.”

이후 그는 <전망> 창간호에서 대안으로서 다음을 내비쳤다.


“어느날 갑자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어 억압받는 모든 민중이 떨쳐 일어서서 생명을 내던지며 일대 결전을 벌이는 극적 상황은 점점 더 오기 어려워지고 있다. 현실의 변화는 구체적 개혁에 의해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의 생활이 개선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꿈같은 유토피아가 일회적 혁명투쟁으로 가능할 것이라는 인류의 웅장한 희망은 결국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어서 그는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목숨을 건 소수의 혁명가가 거대하고 복잡해진 현대자본주의 국가를 일시에 뒤집어엎는 것보다는 오히려 광범한 대중이 정치적으로 깨어나도록 하여 선거와 대중운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나가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길이 아닐까?”

“나는 요즈음 세계 여러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적 경험에 대해 새로이 주목하고 있다. 현실 자본주의의 냉엄한 현실을 공상적으로 건너뛰지 않고 자유·평등·평화를 향한 사회주의적 이상을 향해 착실하게 개량을 축적했던 사람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 김문수는 신한국당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정치권 개혁과 정치자금법 개정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94년 부천소사에서 당시 대통령 김영삼씨의 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제 그는 여기 없고 저기에 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아직 여기에도 있는 것 같다. 당시 학생운동권이나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패배주의에 휩싸이게 한 그 문제는 아직 그 어느 누구도 명쾌하게 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 상처에 보상을 받으려는 것일까? 과거의 화려한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수면으로 올라와 선봉에 서고 있는 것이 보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문수 의원처럼 과학을 버리고 야당이나 여당 둘 중 하나라는 현실에 몸을 던졌다. 지금 한참 뜨고 있는 유시민 의원도 김문수 의원과 서노련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였고 80년대 후반 전국에서 맹위를 떨쳤던 사노맹의 백태웅, 박노해씨도 동지였다. 하지만 이들 중 아직도 노동자들 옆에 있는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투쟁은 끝났고 설사 지금 노동자들이 투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압력 수단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 뿐인 것이 안타깝다. 이 안타까움이 민청학련의 동지로서의 김근태 의원과 유시민 의원 사이의 아쉬움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그저 수고한 것 뿐이지 않는가?

만약 김문수 의원의 생각이 맞다면, 그가 말한 것이 진정으로 옳다면 그가 그저 대통령 형의 비리를 캐고 있다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틀렸다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는 김문수가 ‘전향’(당시 이렇게 표현했다)한 이유에 대해 자신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름은 없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여기에 서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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