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고전음악에서 민중가요까지 심취하다

나의 음반 수집 이야기(2)

등록 2003.05.31 06:12수정 2003.06.0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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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은 국악이 내 애청 음악 목록의 첫 자리에 오르기엔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1980년대 초 고전음악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임동창이나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했던 에이콤의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서상권 등을 레슨했던 이길환 선생이 전북 익산시 중앙동에 있던 고전음악 감상실 <세바스챤>에서 제자들과 함께 열었던 음악 발표회에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따라가기도 했다.

고전음악으로의 경도는 차츰 시(詩)에 대한 배척으로 나갔다. 1차적 언어인 음악에 대한 매료는 자연스럽게 2차적 언어인 시(詩)라는 물건이 가진 인위성과 가식성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난 차츰 시(詩)가 가진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낙서 비슷하게 시라는 걸 끄적거리곤 했던 난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를 깨닫고 미련없이 작파해버렸다.

전라북도 전주나 이리에 사회과학 서점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1983년 그 여름이었을 것이다. 사회과학 서점을 드나들면서 민중가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거기서 훗날 가수 김광석이 참여하기도 했던 노래패 <메아리>라든가 민요연구회의 테이프 등을 구해다가 듣곤 했다. 오르간이나 꽹과리 따위 반주에 맞추어 불리워진 그 노래들이 가진 전투성에 약간의 거부감이 없지도 않았지만 민중가요의 새로운 형식만은 매혹이 아닐 수 없었다.

차츰 테이프을 구하는 내 동선(動線)이 길어졌다. 서울이나 광주를 넘나들었다. 성균관대 입구나 전남대 입구의 사회과학 서점 등이 내 단골이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자 많은 민중가요들이 생산되었고, 그 결과 박종화, 정세현 등 본격적으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난 그 중에서도 지금은 스님이 된 광주의 민중가요 가수 정세현의 노래를 좋아했다. 정세현은 민중가요가 가진 전투성이나 상투성 등을 극복하기 위해 국악적인 요소들을 가미하고 있었다. 양성우의 시에 자진모리 가락을 얹어 부르는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라는 노래는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노래말이 아주 일품이었다.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가난뱅이 등치고/ 애비없는 아이들 주먹으로 때리며/ 콧노래 부르며 물장구치며/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순풍에 돛을단듯이어절시구 침묵의 바다/ 호박에 말뚝박고 똥싸는 놈 까뭉개고/애밴년 배 차대고/ 콧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저 놀부 떡들고 덩실 춤춘다


뽕짝은 일본의 요나누키 음계와 핏줄이 닿아있다. 그리고 난 필연적으로 뽕짝이 키운 자식일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익숙해지면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익숙한 세계로부터의 결별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쁜 습관일지라도 그 익숙함으로부터 빠져 나오길 겁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똑같은 음식을 지속적으로 먹게되면 식상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뽕짝의 지겨움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할까.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래적으로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이런 식의 청승맞음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청승도 일종의 변태적 즐거움으로 앵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난 무려 수 년의 시간을 거쳐 그 청승이라는 무지막지한 감정의 중독으로부터 겨우 빠져나온 셈이다.내가 하루 두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은지 5년이 되어간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뽕짝으로부터 빠져 나오리라 결심한지 20년이 지났어도 술 한잔 마신 날이면 뽕짝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다. 곶감보다 무서운 게 뽕짝 중독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뽕짝은 또 하나의 첫사랑인지도 모른다. 죽을 때 까지 지울수 없는.

87년 6월 '독재타도', '선제 쟁취'는 구호를 외치는 민중의 단결된 힘 앞에 마침내 군부독재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른바 '6.29 선언'이 나오고 이어서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다. 러나 단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배반한 양 김씨의 분열로 말미암아 헌정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국민의 여망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그해 6월은 금방이라도 새 세상이 올 것 같은 기대로 설레었지만 대통령 선거가 끝난 12월에 남은 것은 환멸 뿐이었다. 도회의 생활이 견디기 힘들만큼 지겨워졌다. 난 전북 익산의 한 시골 마을에서 농사일을 하며 이년 가까이 지냈다. 89년 11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쯤에서 내 얼치기 농부 생활도 일단락을 맺었다.


전주 교동 한옥 보존지구에다 집을 구해서 이사를 나왔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삐 살던 시골 생활과는 정 반대의 생활이 전개 되었다. 전통찻집에서 선술집으로, 선술집에서 맥주집으로 옮겨다니는 무위도식의 나날이었다. 마침 집 바로 옆에 '갠지갠'이라는 풍물패가 있었다.예외없이 풍물치는 사람들은 너나 없이 술을 좋아한다. 이 '갠지갠' 사람들은 밤 11시 반 쯤 연습을 마치고 나서야 내게 와서 술 마시러 가자고 청한다. 그렇게 해서 어우러진 술 자리는 새벽 3~4시까지 이어지는 건 기본에 속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으면 이번에는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떼거리로 찾아온다. 전통찻집에 앉아서 작설차 한 잔으로 숨을 고르고 나서 또 다시 막걸리집으로 가서 취하도록 마셔댔다. 어쩌다 한가한 아침 나절에는 혼자 경원동으로 가서 열 대 여섯가지 한약재에 흑설탕을 넣고 끓인, 이른바 술 깨는 술이라는 '모주'를 마신다. 한 잔의 따끈한 모주는 온 몸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적당하게 기분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아줌마, 한잔 더. 한 잔만 더. 석 잔이 넘어가면 다 깬 줄 알았던 어제 저녁 마신 술이 머리 끝까지 다시 올라와 급기야는 작취미성에 이르게 된다.

아편 중독은 불법이고 밥 중독은 '사회'가 용인하는 합법 행위이다.한 중독의 다른 중독에 대한 승리. 싸움에 중독된 인간 사회. 승리 중독.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일어나 밥을 사냥하기 위해 영광스런 일터로 나아간다. 나는 밥 중독자이다. 밥에 취해서 산다. 명백한 중독.
-정현종 詩<절망할 수 없는 것 조차 절망하지 말고24>


모든 중독의 전 단계에는 맹목이라는 단계가 존재한다. 무의미야 말로 중독을 부르는 영매인 것이다. 이 맹목적인 술집 순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언가 색다른 의미를 찾아야 했다. 다행인 것은 전통찻집을 들락거리게 되면서 차츰 국악의 맛을 알아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귀에 와 앵기는 음악이 있으면 즉시 레코드 가게에서 사서 듣기도 했다. 그러다가 교동 입구에 있는 아주 작은 레코드 가게 주인과 친하게 되었다. 그는 음악에 관한한 매니아였다.내가 '무슨 무슨 음반을 구해 주시요.' 하면 몇 일 내로 틀림없이 구해준다.

무슨 가게든 그렇지만 큰 가게는 제아무리 드나들어도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그저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작은 가게는 주인과 손님의 1대 1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나는 그를 통해서 1982년도에 <뿌리깊은 나무>와 <한국 브리태니커>가 함께 만든 LP 3장 짜리 <한반도 슬픈 소리>와 LP 11장 짜리 <조선소리 선집>의 존재에 대해 듣게 되었다.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선집_2 함동정월 가야금 산조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선집_2 함동정월 가야금 산조안병기
이 LP판은 1973년 부터 시작된 <뿌리깊은 나무>의 판소리 감상회 실황을 녹음한 것이었다. 나는 그 레코드 가게 주인에게 공테잎에다 녹음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정작 내가 이 음반을 실제로 갖게 된 것은 대전에 이사를 온 후 였다. 방문 판매를 온 월부책 장사의 카탈로그 속에서 그 LP를 발견하자 마자 반가움에 앞 뒤 가릴 것 없이 덜컥 구입해버렸다. 그랬더니 이 한양대를 나왔다는 월부책 장사는 안 팔리는 물건을 팔았다는 흐뭇함에 겨워서 내게 술 대접까지 극진히 한 후 돌아갔다. 이 14장의 LP는 2000년 8월 <신나라>에서 23장의 CD로 출시되었다.

VICTOR JARA. 민중을 위해 노래를 불렀고, 그 민중들 속에서 독재에 항거하다 짧은 생을 마친 칠레의 가수 겸 저항시인 빅토르 하라의 앨범
VICTOR JARA. 민중을 위해 노래를 불렀고, 그 민중들 속에서 독재에 항거하다 짧은 생을 마친 칠레의 가수 겸 저항시인 빅토르 하라의 앨범안병기
하루는 노동길이 운영하던 전주의 사회과학 서점 <금강서점>에서 1988년 한길사에서 나온 <끝나지 않은 노래>라는 책을 샀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총살당한 칠레의 민중가요 가수 빅토르 하라의 일생을 그의 아내인 조안 하라가 쓴 책이었다. 맨날 눈물타령, 사랑타령 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 가요계의 현실이 한심했다. 왜 우리에게는 빅토르 하라 같은 가수가 없는가.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담은 라틴 아메리카의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운동은 내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브리태니카 판소리 수궁가_소리.정권진/북.김명환
브리태니카 판소리 수궁가_소리.정권진/북.김명환안병기
1981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도서출판 <뿌리 깊은 나무>의 <민중 자서전>의 11번째 책으로 1990년 말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가 나왔다. 소리북을 치던 명고수 김명환(1913~!989)의 생애가 그의 구술로 정리된 책이다. 김명환 고법의 창의성은 특유의 북가락, 변주 방법, 독특한 추임새 등이다. 그에게 북을 배운 도올 김용옥이 "다시는 그와 같은 명고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그의 소리북은 정말 일품이었다.

격조있는 소리를 가릴 줄 아는 안목이 있었던 그는 "아, 요새 놈들 소리해 뿌리면요, 참 내 북이라도 쳐 묵을랑께 인심 안 잃을라고 암말도 안해도, 꼭 불붙은 송아지 새끼 뛰어댕기듯 함부로 뛰어댕겨. 소리에 가 뼈다귀도 없음섬 지 소리럴 기양 견본으로 해서,시상 사람들 헌티 다 지 소릴 갈친단 말여."라고 판소리의 법도가 무너지있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야금 산조든 판소리든 간에 김명환의 북장단이 들어 있으면 그것은 무조건 내 수집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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