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왜곡된 이미지, <이슬람>

기존 관념과 새 지식의 충돌, '이해의 융합' 과정을 거쳐야

등록 2003.06.01 18:51수정 2003.06.0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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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을유문화사
2003년, 을유문화사을유문화사
확실히 유통기한은 지났다. 이슬람에 대한 관심 말이다. 적어도 '충격과 공포' 작전이 종료된 지금 시점에서, 이슬람에 대한 관심은 언론의 지면 밖 논외 문제로 벗어났다. 설사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접한다 하더라도 제약된 범주 내에서다. 하나는 '자살테러'요,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 뿐이다.

관심 부족 뿐이랴. 이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또한 그에 못지 않다. 한 문구면 족하다. '무지와 의도된 왜곡'. 이것이 이슬람을 바라보는 정확한 우리의 시각이자, 벗어나야 할 우리의 시각이다. '한 손에는 쿠란, 한 손에는 칼'을 든 호전적인 집단들로 무슬림을 도배하고, '차도로'를 쓴 여성들의 이미지를 통해 최악의 인권 침해 집단으로 확대재생산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일 수 있다. 하버드대 석좌교수인 새무엘 헌팅턴이 지은 <문명의 충돌>에 나타난 이슬람 문명관이다. "세계 정치는 문명적 특성에 따라 재구성되고,문명간의 단층선 지대가 세계정치의 갈등무대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는 이슬람과 서구의 충돌과 위기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서구는 이슬람을 어떻게 든 극복해야 할 타자이자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헌팅턴이 왜 앞으로의 정치적 지형을 문명권 간의 대립과 갈등 양상으로 예측했는지 따져 볼 만도 하지만, 이는 제쳐두자. 다만 이러한 헌팅턴 식 문명 이해가 확실히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는데 기점이 된 것 만은 확실하다. 이렇듯 우리의 이슬람 이해는 앞에서 얘기한 세 가지 기본 전제를 안고 들어 간다. 관심 부족과 왜곡된 이미지, 그리고 충돌과 위기의 온상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고, 그리고 한계를 넘기 위해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할 듯 하다. 가장 실효성 있는 대안은, 이전의 모든 이슬람 정보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고 지금부터 새롭게 들어오는 이슬람 정보를 섭취하는 것이겠지만, 실효성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다만 이해하려는 관심의 노력과 옳은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상식' 정도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제안해볼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해서 책 한권을 제안한다. <이슬람>(을유문화사, 2003)을 말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카렌 암스트롱인데, 그이에게는 항시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과거 칠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였다가 환속한 여성이라는 꼬리표다. 그러나 환속한 이후, 카렌에 대한 적절한 직함은 아마도 종교학자라는 것과 종교문화비평가일 게다. 그리고 서구인이지만 서구인 답지 않게 이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학자라 할 수 있을 게다.

<이슬람>은 사실 분량상 그리 두껍지도, 서술상 그리 딱딱하지도 않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 수 있다. 그러나 읽다 보면 내용상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약간은 '진지한 숙고'가 동반돼야 함을 깨닫게 된다. 기존의 관념과 새로운 지식의 충돌, 그리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해의 융합'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이런 수고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펼쳐볼 필요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수고 외에 다른 수고까지 감내해야 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느낀 점을 동호회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가, 이 책을 중심으로, 이슬람 전반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된 것이다. 굳이 토론에 제목을 붙이자면 '이슬람 전공 학생과 나눈 대화'라 할까. 의도하지 않은 격한 표현까지 오고 가긴 했지만, <이슬람> 덕택에 '지적 피드백'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이제 토론에서 오고 간 대화로 서평을 대신한다.

K : 철저한 효율성 신화를 내건 서구 사회의 근대화, 세속화 과정에서 서구 사회가 서구 밖 사회 이슬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는지 카렌 암스트롱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슬람 세계는 근대화 과정에서 격동을 겪었다. 이슬람권은 세계 문명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재빨리 유럽 열강에 의해 영구적인 종속 지역으로 그 지위가 내려갔다. 식민주의자들은 무슬림을 경멸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근대 정신에 철저히 매몰되어 이슬람 세계의 후진성, 비효율성, 숙명론, 부패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럽 문화가 언제나 진보적이었다고 여겼으며, 역사적 안목이 결여된 결과 단순히 전근대적인 농경 사회만을 바라보았다. ...... 식민주의자들은 서양인들이 선천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동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며, 수많은 방법으로 동양인에 대한 경멸감을 표현했다. 이 모든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서양인들은 인간을 자유롭고 강력한 존재로 만든 그들의 서구 문화에 무슬림이 갖는 적개심과 증오에 놀라곤 한다. 그러나 무슬림의 이러한 반응은 별난 것도 정도를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서구 사회가 애초 자신들의 근대적, 세속적 문화에 우월적 지위와 가치 우위를 둔 터에 이슬람 뿐만 아니라 다른 비서구 문화는 모두 덜 우수한 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카렌은 서구 사회가 이슬람의 독특한 문화 전통, 종교가 문화고 문화가 종교인 "인간 역사의 신성화"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적 '구원'이란 인류를 위해 신의 뜻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사회 구현을 말한다."

이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시 한번 이슬람은 종교와 문화가 세속적인 것과 비세속적인 것이 성과 속이 이분법적으로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뜻에서 보자면, 서구 사회에서 가열차게 진행하고 있는 세속화(종교와 정치의 분리)와 근대화(과학적 효율성)는 어쩔 수 없이 이슬람의 시각과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부 과격 테러를 행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결국은 이러한 대립각 속에서 자신들의 전통도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와 절망이 테러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S : 소개해 주셨듯이 카렌 암스트롱의 세번째 번역본이 나왔더군요. 첫번째가 신의 역사, 두 번째가 마호메트 평전, 그리고 세번째가 이번 이슬람이지요. 신의 역사가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였을 정도로 카렌 암스트롱은 국내보다도 서구에서 더 인기있는 작가인 듯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무조건 우호적으로 보는 것도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카렌 암스트롱이 이렇게 인기를 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시각이 무척이나 새롭고 또한 대중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동안 (그리고 현재도 많은 학자들이)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존재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와디이즘'과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이겠지요.

이에 비해 카렌 암스트롱은 서구인이지만 무슬림의 입장에 서서 이슬람을 서구인에게 설명하는 입장을 취합니다.(화자인 그녀가 서구인이며 가톨릭 수녀였다는 위치는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분명 그녀의 입장은 그동안의 소위 '오리엔탈리스트'들의 논의와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렌 암스트롱은 이슬람의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면에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암스트롱의 책은 학술적인 면을 갖추면서 대체로 정감적이고 이야기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서술하고 있는 것이 '원형적인' 모습의 이슬람이며 현대의 감각에 조화시키기는 데에 어느정도 '이상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S : 두 번째로 현재의 근본주의(원리주의, 종교 민족주의, 테러리즘 등 여러 형태로 불리는)는 암스트롱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역사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비교해 봤을 때 이슬람에는 내세관이 분명히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그 궁극적 관심이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에 있는 것에 비해 이슬람에서는 현재 역사에서 이슬람 공동체(움마'ummah)이상이 상당히 강합니다. 게다가 그들이 거둔 역사적 성공은 하느님(알라, The God)이 그들의 공동체와 함께 하신 덕분이라고 생각했지요.

분명히 서구 제국주의 앞에서 이슬람 역사가 급격히 쇠퇴한 것은 단순히 현상 때문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쇠락은 '내적인 타락'과 '서구의 외적 외협'이라는 두 가지 원인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지요. (18세기 알 아프가니 이후로 뚜렷해 졌는데)

먼저 내적인 타락은 초기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서구에 대항하는 것.

이 두 가지 모티브가 현대 이슬람에 그대로 나타나는 듯 합니다. 사실 이것은 중세의 이슬람의 커다란 발전을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중세의 철학과 신학, 신비주의 전통은 전통의 타락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현재 사우디 아라비아의 전신인 와하비 운동이 대표적인 경우이지요) 그러면서 이슬람 법(샤리아)를 굉장히 보수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지요.

오히려 현대에 들어서서 이슬람이 오랜동안 이루어온 유연한 문화를 파괴해 버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탈레반이나 현 사우디을 연상하면 될 듯)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슬람 법체계는 상당히 보수적이지요. 이슬람 팽창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법 집행의 유연성, 해석의 다양성, 자율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슬람 근대 사상가들은 대부분 이슬람 율법에 매달렸는데 (이것은 이슬람 특성상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많은 부분 근대의 민족주의론, 국가론과 결합되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파키스탄 자미아티 이슬라미의 창시자인 마우두디를 들 수 있을 듯)

이슬람 근본주의를 이슬람 내적 문제로만 해석하면 곤란할 듯 합니다. 단순히 박탈감이나 서구에 대한 이슬람적 반발로 해석하게 되면 결국 근본주의를 이슬람의 내적 성질로 귀결시킬 위험이 생겨버릴 것 같습니다. 카렌 암스트롱 이야기로 다시한번 돌아가면 그녀의 논의도 현재의 문제를 이상화된 이슬람의 면으로 돌릴 수 있는 맹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든 나쁘든 현대의 이슬람의 모습은 엄청난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던 중세보다도 더욱 더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이제 이슬람이란 것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여전히 자신들을 무슬림이라고, 자신들이 지닌 것이 이슬람의 모습이라고 믿는다면, 여전히 이것도 이슬람의 모습으로 연구해야 하겠지요.

K : 이번 카렌 암스토롱의 <이슬람>은 역사적인 접근 방식으로 이슬람의 초기, 발전기, 전성기, 황금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접근만 하느냐. 당근 그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데, 카렌 암스트롱은 역사적 접근을 비교적 상세히 다룬 뒤 그에 대한 자신의 해석 또는 이해를 덧붙입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카렌 암스토롱은 학술적이지만, 덜 학술적인 면, 곧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면”이 농후하다고까지는 못해도, 짙게 배어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령 오늘날이나 역사적 과정에서 나타난 다른 종교에 대한 비관용적 자세가 ‘원형적인’ 모습의 이슬람에서, 곧 꾸란의 구절에 비춰보면 전혀 그런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어떻든 간에 제 생각은 카렌 암스트롱의 그러한 이상적이며 낭만적인 모습, 곧 원형적 이슬람에 대한 노스탤지아가 비록 현대적 감각에서 ‘이상적인’ 한계가 있을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전제라 생각됩니다. 곧 “인간 역사의 신성화”란 웅대한 알라의 명령에 합당하게 이 사회에서 그러한 “인간 역사의 신성화”를 이룩하는데 근본주의적으로, 낭만적으로, 이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러한 향수가 이슬람에 있어서는 하나의 자기 개혁적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은 기독교 전통이나 다른 종교 전통에 비춰봐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장점이 맹점이 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장점이 더 돋보일 것 같습니다. 철모를 주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S : 비단 카렌 암스트롱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 이슬람이 가진 특성이라 생각됩니다.

지난번에 올리셨던 이원삼 선생님의 꾸란 해석에 대한 논의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또한 꾸란에 분명히 관용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지요.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문제되는 부분은 가족법 부분, 여성 문제, 그리고 그 실행에 있어서 종교법을 사회에 적용시켜야 하느냐의 문제인 듯 합니다. 그러한 쟁점에 대한 논의 없이 이슬람은 '원래 어떠어떠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는 것은 진정한 이해에도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무슬림 내부의 현재 문제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상당히 왜곡된 방식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인 것 같네요. 문제는 향수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슬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방식인 듯 합니다. 사실 이슬람은 상당히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충분히 역사적 사실로도 뒷받침 가능하구요.

K : 역시 현대의 세속화, 근대화 흐름 속에서 이슬람이 어떠한 대처를 해야만 할까라는 것이 주제인 것 같습니다. 가령 저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 종교법의 사회적 적용은 필수불가결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전제임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젠체하는 서구의 세속화, 근대화가 결코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꾸란에 근거한 이슬람의 오랜 문화이자 종교이고, 종교이자 문화인 이슬람 전통에 대해, 서구에서 자꾸 태클을 거는 상황에서 과연 이슬람 전통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이나 지도자들은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입니다.

개혁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인식, 꾸란의 내용을 문자적 의미가 아닌 새롭게 하자니 완전한 계시가 깨지게 되고, 그렇다고 완전한 계시인 꾸란대로 하자니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서구의 태클과 도전을 받게 되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입니다. 이런 딜레마적인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입니다.

S : 이슬람에 대해 지적하신 문제들은 무슬림들 뿐만이 아니라 이슬람 연구자들, 이슬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인 듯 합니다. 저 역시 이슬람에 관심을 가져오면서 한국 무슬림들, 외국인 무슬림들, 무슬림 학자(한국인 무슬림학자에서 사우디의 보수적 이맘까지), 외부인 이슬람 연구자들, 이러 저러한 사람들과 짧게나마 접촉할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회 속에서 제가 느낀 것은 엄청난 인식의 격차로 인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리엔탈리스트(?)들 뿐만이 아니라 내부자들도 상당히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는 생각을 했구요. 또한 무슬림들의 삶과 직접 관련된 문제이므로 참 어렵고 민감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슬람

카렌 암스트롱 지음, 장병옥 옮김,
을유문화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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