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악은 '느림'에 그 생명이 있다

나의 음반 수집 이야기 - 에피소드<3>

등록 2003.06.02 10:44수정 2003.06.03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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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5경(經) 중 하나인 <예기(禮記)> 중<악기(樂記)> 23편(扁)에는 좋은 음악이란 어떤 음악이라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다.


狄은 與적으로 同하니 遠也라 成者는 樂之一終이니 狄成은 言其一終이 甚長이니 1淫일之意也라 2滌은 洗也오 濫은 3侵僭也니 言其音之4泛濫侵僭이 如以水洗物而5浸漬侵濫하야 無分際也니 此是其喜心感者而其聲然也라

적(狄)은 적(적)과 같으니 멀다는 뜻이다. 성(成)은 악(樂)이 한번 끝난 것인데, 적성(狄成)은 악(樂)이 한번 끝나는 것이 매우 긴 것이니, 방종(放縱)하다는 뜻이다. 척(滌)은 씻는다는 뜻이요, 남(濫)은 차차로 참람(僭濫)해진다는 뜻인데, 그 음(音)이 넘쳐나 참람(僭濫)해지는 것이 마치 물로 물건을 씻을 때 배어 들어가 차차 넘쳐 한계가 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그 기뻐하는 마음이 느낀 사람은 그 소리가 그러하다.

"애이불비(哀而不悲)", 이 원칙은 시(詩)에서도 통용되는 것이지만 그 원칙은 음악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슬픈 감성만을 자극하는 음악의 난무는 결국 우리 시대가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레게 등 빠른 음악의 범람은 우리 시대가 느긋하게 앉아서 평화를 즐기기에는 너무 불안과 초조로 넘쳐있다는 걸 반증해주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위의 사항 외에도 내가 음반을 고를 때 맨 첫째로 음악적 완성도를 고려한다. 그 다음이 역사성이다. 이것은 대개 작곡자의 생애와 연관돼 있다. 가령 메르세데스 소사, 테오도라키스, 빅토르 하라 등은 음악성 이전에 독재에 저항한 그들의 생애가 녹아있다라는 생각이 내 수집욕을 자극해온다. 그 마지막으로 고려되는 것이 희소성이다.

전주에 살 때 아는 사람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의 집에는 1000만원도 더 나간다는 아주 비싼 오디오가 있었다. 둘이 한참 권커니 자커니 술을 마시다가 음악을 하나 틀어달라고 했더니 이내 나훈아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아마도 '개발에 편자'란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하드보다는 소프트웨어가 좋아야 내용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겉치레에 더욱 더 신경을 쓴다. 어떤 오디오로 듣느냐의 문제보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라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시간이 흐를수록 내 수집벽은 광증(狂症)을 띠어갔다. 한 장의 음반을 구하기 위해서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청계천 7가나 장안평 고미술 상가를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하는 음반을 구하지 못하면 국악원이나 공공 도서관에 가서 녹음을 해오기도 했다. 이곳 대전에 이사 와서도 시립 연정국악원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옛 명창들에 대한 기록이며 음향자료들을 섭렵했다. 한번은 음향자료를 훑어나가다 보니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LP 50매 짜리 <국악의 향연>이라는 시리즈물이 있었다. 그 중에는 박봉술, 한승호 등의 적벽가와 정광수, 박초월의 수궁가등 판소리 한 바탕에 LP 네장씩 총 20매로 짜여진 판소리 5바탕도 끼어 있었다. 나는 사서 담당인 최연희 여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연정국악원 이층에 있는 오디오에다 LP 음반을 걸어놓고 녹음을 했다. 이 녹음 작업은 점심도 거른 채 꼬박 이틀 동안 총 16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녹음을 시작한지 3일 째 되는 날이었다. 이번엔 기악곡 등을 녹음하려고 갔더니 왠일인지 최 여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러더니 저작권에 저촉되기 때문에 더 이상 녹음이 불가하다고 했다. 이 돌발적인 상황이 적잖이 황당했다. 나는 상업적 용도가 아닌 개인적 녹음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한번 거부한 최 여사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중앙일보사에 직접 요청해서 이 판들을 구입하리라 다짐하면서 연정 국악원을 뚜벅뚜벅 걸어 나올 수 밖에 별 도리가 있었겠는가.

음반 중에는 시중에 배포지 않는 것도 많다. 요새는 국악도 사가반이라 해서 창자(唱者)개인이 제작해서 아는 사람끼리 기념으로 간직하는 수도 있다. 한편 대학에는 음악 연구소를 두고 있는 데가 더러 있다. 나는 서울대학교 음악 대학 교수인 백병동의 음악을 좋아했다.

1965년 국악기를 위한 별난 현대 음악 ‘실내음악(가야금곡)’으로 시작한 그의 작곡 활동은 ‘눈물 많은 초인-인간 박정희’로 이어지기까지 독주곡, 실내악곡, 관현악곡, 칸타타 등 동·서양 악기를 넘나드는 작품이 100여 곡에 이른다. 서양음악에 국악적 요소를 가미하기도 하고 반대로 국악을 서양음악에 접목시키기도 한다. 가야금 독주곡을 현대음악적 기법으로 썼던‘신별곡’(1972)이 대표적인 예다.

백병동 작품집 앨범 자켓
백병동 작품집 앨범 자켓안병기
몇 년 전엔가 BMG라는 회사에서 <백병동 작품집>이라는 이름으로 두장 짜리 CD를 냈다. 그런데 우리나라 창작곡 작곡 목록이 수록된 책을 뒤적이다가 서울대 서양음악 연구소에서 자체 제작한 백병동 음악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울대 서양 음악 연구소의 민은기 교수와의 전화 끝에 연주 현장의 기록(1974~2000) 서울대학교 서양음악 연구소 현대 작곡가 시리즈1 백병동이라는 4장 짜리 CD를 손에 넣게 되었다. 고맙게도 민 교수는 <오늘을 노래하는 민요>라는 서울대 자체의 연구 음악회 실황을 담은 CD까지 덤으로 보내 주었다.

2001년 3월 FM 국악방송이 개국했을 때의 일이다. 인터넷으로 국악방송을 듣다보니 라디오 청취가 가능한 지역인 서울 경기 지방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청취소감을 보내주는 천 명을 골라 개국기념 음반과 테이프를 나눠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난 국악방송에 긴 메일을 보냈다. 방송 못 듣는 것도 억울한데 왜 아래지방 사람들에게는 음반마저 주지 않느냐? 너무한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랬더니 국악방송 안진홍 기술국장께서 답장과 더불어 <행복한 하루>라는 3장 짜리 CD를 보내 주셨다. 그 CD엔 마음의 안식을 얻기엔 안성맞춤인 평화로운 음악으로 가득해 있었다.

요 몇 년 사이 시립 국악관현악단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관현악단들은 자신들의 연주를 자체 제작하여 나눠 갖기도 한다. 물론 서울 시립 국악관현악단이나 부산 시립 국악관현악단처럼 시중에 출시되어 판매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증으로 처리되고 만다.

많은 시립 국악 관현악단 중에서도 안산 시립 국악관현악단의 이상균 단장은 참으로 부지런한 분이시다. 연주 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외부에 안산 시립 국악 관현악단의 존재를 알리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분과는 몇 번의 메일이 오간 끝에 <민족 음악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두 장 짜리 CD를 얻은 일도 있다.

음반을 구하는데 있어 가장 난공불락의 요새는 국립 문화재 연구소가 으뜸이다. 거기서는 기록할 가치가 있는 무형문화재는 죄다 기록 보관해둔다. 판소리도 마찬가지다. 무형 문화재 중 여생이 얼마 안 남은 분 등을 대상으로 녹음을 진행한다. 재작년엔 중요 무형문화재 5호 한승호님의 <적벽가>녹음이 이뤄졌다는 걸 알고 구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나 공공 도서관 마다 배포했으니 도서관에 가서 들으면 된다는 무성의한 대답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대전 시내 공공 도서관마다 쫓아다니면서 음반의 존재 유무를 문의해 봤지만 사서 담당자들 중에서 그 음반의 존재를 아는 분이 아무도 없었다. 한 술 더 떠 문화재 연구소라는 게 있다는 걸 아는 사람조차도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정말이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민족문화에 대한 홀대가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실한 반증이었다. 몇 번이나 도서관들을 찾아가 항의한 끝에 최근 대전 시립 도서관의 창고에서 제멋대로 방기돼 있는 음반들을 찾아냈다.

요즘 그것을 빌려다가 CD로 굽고 있는 중이다. 문화재 연구소에서 나온 <김명환의 판소리 고법>이라는 4장 짜리 CD를 굽는 마음이 너무나 흡족해서 점심을 건너뛰고도 배고픈 줄을 모르겠더라는 말씀이다.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서 나온 <김명환의 판소리 고법> 앨범 자켓
국립 문화재 연구소에서 나온 <김명환의 판소리 고법> 앨범 자켓안병기
내 자신을 엄격히 평가한다면 나는 결코 광적인 수집가는 아니다. 다만 좋은 음악을 찾아 헤매었을 뿐이다. 요즘에는 국악 음반을 거의 구입하지 않는다. 요새 사람들의 연주 기량을 그리 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판소리 창자라는 사람들은 닦다만 기량을 가지고 텔레비전에 나와서 창극조로 덜 떨어진 소리를 하고 7살 짜리 어린아이는 국악 신동이라는 이름으로 몇 시간 동안 완창을 한다.

심하게 말해서 '국악으로써 국악을 죽이는'것이다. 만일 그 아이가 정말 국악 신동이라면 소리가 채 익기도 전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소리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지는 게 세상 이치다.

삶은 깊이가 충족될 때까지 기다리는 지루함을 감수해야할 때가 있다. 이제 사물놀이도 거의 한계에 와 있는 듯 하다. 새로운 가락을 발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맨날 '그 밥에 그 나물'인 채로 몇몇 가락만 우려먹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청중의 인기에만 영합해서 빠른 휘모리 장단만을 즐겨 연주하는 관행에 젖어 있기까지 하다. '굿거리 장단에서 춤 나온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음악은 '느림'에 그 생명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느림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화가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이제 국악 음반은 어느 정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내 관심은 차츰 월드뮤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음악이란 게 결국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라면 억압에 대하여 항거했던 가수나 작곡가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 하라, 메르세데스 소사, 비올레타 파라등 남 아메리카나 그리스의 테오도라키스 등 독재에 항거했던 이들의 음반이 내 수집 목록에 등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빠른 음반 수집을 위해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인터넷의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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