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모가 아닌 아이들의 가정이 될 터"

영광 '염산 사랑의 집' 이연숙씨의 '한 식구' 살림

등록 2003.06.05 19:52수정 2003.06.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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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염산면사무소를 지나 원불교 3거리에서 우측 산길을 따라 5분쯤 올라가자 산모퉁이 사이로 아담한 단층 조립식 건물 몇 채가 다가온다. 지난해 조건부 아동시설로 신고된 '염산사랑의 집'. 뒤쪽은 봉덕산이 둘러있고 툭 트인 앞으로는 한때 염전 밭으로 명성을 떨치던 염산 앞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a 사랑의 집 마당에서 아이들이 앙증맞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랑의 집 마당에서 아이들이 앙증맞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국언

시설장 이연숙(49)씨가 바위덩어리나 다름없던 이 산 기슭에 터를 닦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 그녀가 오갈 데 없는 주위 사람들과 한 식구로 살아가자고 작정하면서부터다. 대학에서 물리치료를 전공하기도 한 그녀는 결혼 후 첫 아이를 갖고서부터 잦은 출혈로 몸이 점점 쇠약해져 갔다고 한다.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 건강을 잃었던 그녀는 지난 86년 남편 김형식(56)씨와 함께 이곳 염산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염기가 가장 많다는 이곳에서 바닷바람이라도 쐬면서 자연치료를 해 보라는 한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한 집사의 간절한 보살핌으로 차차 건강을 회복하게 된 그녀는 그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어려운 이웃에 봉사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가정 해체된 20여명 아이들의 보금자리

결손가정 아이들을 하나 둘 돌봐 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건강이 회복되면서 그녀가 물리치료를 통해 약간의 수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IMF때는 공사 업자가 도망가는 바람에 없는 돈을 떼이기도 했던 그녀는 넉넉지 않는 형편 때문에 한해는 거실을 들이고 그 다음해는 공부방을 들여가는 방법으로 3차례에 걸쳐 지금의 조립식시설이나마 갖출 수 있게 됐다.

염산 사랑의 집 식구들은 20여명. 이곳을 거쳐 광주나 외부시설에 나가있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35명 정도다. 학생은 유치원생 2명, 초등학생 11명, 중학생 1명, 고등학생 1명이다. 또 광주에서 대학을 재학중인 아이들도 6명이나 된다.

"아이들은 모두 우리보고 '엄마', '아빠'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사감으로 있는 아저씨는 '삼촌'이라고 하고 또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불우이웃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이들의 대리모가 아니라 아이들이 잃어버린 가정이 되고 싶습니다."


a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어쩔줄 몰라하며 어깨에 매달리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어쩔줄 몰라하며 어깨에 매달리고 있다. ⓒ 이국언

이 시설장은 4살 아이부터 팔순 할머니까지 이들 모두 '한 식구'라고 말한다. 군청 사회복지사나 교회를 통해 이곳에 의탁된 이들은 결손가정 아이들이 많지만 간혹 알콜중독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은 남매나 형제사이가 많다. 가정이 한꺼번에 해체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매·형제사이, 건강 좋지 못한 경우 많아

혜진(초4), 유진(초3), 효진(초1)은 서로 자매이다. 이 시설장은 건강을 되찾은 효진이가 더 없이 사랑스럽고 고맙다고 한다. 효진이는 지난해 11월 저당철분 증세로 쓰러져 한밤중 광주 기독병원까지 후송되는 큰 고비를 맞아야 했다. 3년여 병원비로 적지 않은 빚을 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건강을 되찾아 올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많은 아이들은 가정이 해체되면서 영양섭취가 고르지 못하거나 알콜 중독 부모의 영향 등으로 천식, 기관지질환, 심장질환, 간염 등 각종 질환을 앓아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다. 이 시설장은 만 18세가 되면 이들 보호시설에서 모두 퇴소하도록 돼 있는 '아동복지법'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18세면 고등학교 3학년밖에 안 되는데 숨이 가빠 사회에 나가도 노동능력이 없는 애들이 가면 어디로 갈 것입니까. 갈 곳이 없는 애들이 탈선에 빠지든가 고아가 다시 고아를 낳는 세상이 반복될 것 아닙니까."

이 시설장은 "전국에 그동안 미신고 시설로 있던 보호시설이 작년 한해 신고한 곳만 1천여 곳에 이른다"며 "보건복지부 예산문제로 신고를 해도 그 많은 시설에 대한 대책도 마땅치 않다"고 말한다.

"아동시설 기준 완화해야"

그녀는 정부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아동시설의 규격을 완화하지 않고는 결손가정 아이들의 보호가 어렵다고 말한다.

정부는 아이들 10명 기준에 거실 8평, 운동장 50평, 모래백사장 5평, 놀이시설 등을 갖춘 곳만을 인가해 재정을 지원한다고 하지만 도시의 경우 재력 있는 법인이 아니고서 누가 이런 시설들을 갖출 수 있겠느냐는 것. 이런 규정을 지키지 못하는 시설의 아이들은 방치할 것이냐는 것이다.

a 건강을 되찾은 효진이(오른쪽) 가 밝게 손가락을 펴 보이고 있다.

건강을 되찾은 효진이(오른쪽) 가 밝게 손가락을 펴 보이고 있다. ⓒ 이국언

이 시설장은 노동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위해 신학대학에 보내 많은 노동을 피할 수 있는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권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후원금으로는 감당해내기 어렵지만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할 것 아니냐는 것.

등록금이 없어 매번 분납하기 일쑤이고 그것도 안되면 학교에 인감증명서를 떼다 주며 학생보증을 서면서도 대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등록금이 없어 자신의 외아들도 작년 한학기 휴학해야 했다.

올해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한 미경(가명·23)씨의 학위증과 교사자격증을 자랑스레 액자에 담아 사무실 내 걸어 놓은 것은 이런 뿌듯함 때문이다.

2005년까지 나머지 사람은 퇴소해야

염산 사랑의 집은 아동시설로 신고돼 오는 2005년까지는 18세 미만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은 이 시설을 떠나야 한다. 아이들한테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이었던 바로 그들이다.

"의료보험 관계로 동거인으로 신고했다가 저한테까지 차압이 들어와 할 수 없이 개인세대로 분리해 뒀습니다. 정부는 자식이 있다는 한 단면 밖에 보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자식들은 IMF로 카드 빚으로 파산 당하고 쫒겨 다니지만 정부는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자식이 있다는 이유에서 부양가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입구에서부터 "엄마"를 부르며 이 시설장의 품에 한 아름 안긴다.

연호(초5)와 연주(초2)는 남매다. 연주는 구연동화와 노래를 잘한다고 한다. 곧장 수화를 선보이고 있었다. 오빠인 연호는 축구부 선수다. 천식기가 있으면서도 운동이라면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야무지게 생긴 연호는 이운재 선수를 좋아한다며 국가대표가 꿈이라고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지금의 식구들이 흩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시설장의 목소리가 더 없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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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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