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한 자에게 역사는 어떤 벌을 내리는가

항일유적답사기 (32) - 장춘(Ⅱ)

등록 2003.06.06 10:47수정 2003.06.0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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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위황궁 근민루, 외빈 접대와 의식 장소로 사용된 곳이다. 아편에 찌든 황후 완용의 모습이 납인형으로 전시돼 있었다.

위황궁 근민루, 외빈 접대와 의식 장소로 사용된 곳이다. 아편에 찌든 황후 완용의 모습이 납인형으로 전시돼 있었다. ⓒ 박도

위황궁

여자의 욕심은 바다를 다 삼키고도 부족하다고 하였던가?


청나라 말기에 탐욕과 노회(老獪)의 극치를 보였던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 2대에 걸친 섭정에도 부족하여 포대기에 싸인 세 살 난 푸이(溥儀)를 광서제에 뒤이어 황제로 등극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욕심 많던 서태후도 하늘의 뜻은 거역할 수 없어서 푸이가 황궁(자금성)에 들어간 지 사흘째 되는 날,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푸이는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청나라 제 12대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유모 젖이나 빨던 아이가 무엇을 알았으랴.

자금성 태화전에서 푸이의 ‘등극대전’이 거행될 때 문무백관의 축하 조례를 받으면서 그의 아버지가 어린 황제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자,

“이곳은 견딜 수 없어요! 집에 갈 테야. 있기 싫어요! 집에 갈 테야!”하고 몸부림치며 울먹였다니, 유럽 대륙보다 더 큰 땅덩어리를 가진 청나라가 세 살 난 황제 아래 어찌 온전할 수 있었으랴.


선통제(宣統帝) 푸이는 권력이나 영화의 맛을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반만 흥한(反滿興漢), 민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1911년 신해혁명으로 강제 퇴위 당했다.

그 후 원세개(袁世凱)가 죽은 후, 잠시 복위하였으나, 혁명의 거센 파도로 또 다시 궁중에서 쫓겨났다.


그는 일본의 비호 아래 천진(天津)조계를 배회하다가, 193l년 9월18일 일본이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세우자 처음에는 집정부 집정에, 이어서 1934년에는 만주국 황제 자리에 올랐다.

사람이 한 번 황제에 등극하는 것도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인데 그는 세 번이나 황제에 올랐다.

그의 생애를 잘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귀하신 몸’이냐고 우러러볼 지도 모르겠으나, 세 번의 재위 기간 동안 제대로 실권을 행사한 적은 한번도 없는 꼭두각시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만주국 황제로 재임하던 어느 날, 푸이는 갑자기 산보를 하고 싶어서 황후 완용과 두 여동생을 데리고 그의 연호를 따서 이름 붙인 대동공원으로 갔다.

그러나 잠시 후 일본 헌병대와 집정부 경찰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황궁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가 말없이 집정실을 벗어나자 집정실 관리는 곧장 일본 헌병사령부에 알렸고, 헌병사령부에서는 즉각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성 전체를 시끌벅적하게 했다.

이처럼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산보조차 할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황궁에서 무위도식의 세월을 보냈다.

a 푸이 일생 중 드리마틱한 세 장면, 3세 때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등극(왼쪽) 1934년 괴뢰 만주국 황제로 등극(가운데), 하얼빈 전범관리소 감옥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푸이(오른쪽)

푸이 일생 중 드리마틱한 세 장면, 3세 때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등극(왼쪽) 1934년 괴뢰 만주국 황제로 등극(가운데), 하얼빈 전범관리소 감옥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푸이(오른쪽)

뒷날 푸이가 전범 생활 중에 쓴 자서전 <我的前半生>(아적전반생)에 따르면,

“나는 정사에 간섭할 수 없었음은 물론, 마음대로 외출하거나 대신을 찾아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다. 관동군 측에서 별도 지시가 없을 때에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생겨서 새벽 3시에 잠이 들어서 아침 11시 무렵에야 일어났다. 내 일상 생활은 자고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안사람을 때리고 욕하는 것, 점치는 것, 약 먹는 것, 두려워하는 것”

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민족을 배반하면서 괴뢰 만주국 황제로 재임하던 동안, 백성들은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로 도탄(塗炭)의 고통을 당했다.

일제는 군비 조달을 위해 만주 일대에 아편을 재배하여 만주국이 망할 때까지 삼 억 냥이 넘게 생산 판매해서 백성들을 아편중독자로 만들었으며, 동북지방에서 생산되는 곡물 대부분을 강탈하여 갔고, 25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를 강제 징집해 갔다.

이 모두가 꼭두각시 황제의 칙령으로 행해졌다.

a 감옥에서 특사로 풀려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꼭두각시 황제 푸이,  그는 그제야 평범한 공민(백성)이 되었다.

감옥에서 특사로 풀려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꼭두각시 황제 푸이, 그는 그제야 평범한 공민(백성)이 되었다.

종전 후 그는 전범으로 소련에 끌려가서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5년간의 억류 생활을 하고, 다시 중국 측에 인도되어 무순(撫順), 하얼빈 전범관리소에서 10년의 감옥 생활을 한 뒤에야 일개 공민 신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때 감옥에서 특사로 풀려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여태 진열관에 전시되고 있었다.

그 뒤 1960년 그는 중국과학원 식물연구소의 베이징〔北京〕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연명하다가 1975년 암으로 사망했다.

모름지기 황제는 만백성의 어버이다. 그런 황제가 만백성은 돌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부귀영화를 꾀하다가. 강대국에 빌붙어 나라와 겨레를 반역한 끝에 남은 것은 오욕의 역사뿐이었다.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사람에게 역사는 어떤 벌을 내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 어리석고 둔한 나그네도 이런 문제의 답을 잠시 둘러본 위황궁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는 조국과 민족을 반역하면서 외세에 빌붙어 춤추면서 백성들을 짓밟은 자들에게 준엄한 역사의 철퇴가 내려지리라.

그래야 비로소 이 땅에 정의의 싹이 돋아날 것이다. 그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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