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면일호는 제세활빈단이 활빈당의 후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길 전에는 활동 범위가 선무곡 내에 국한되었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하였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활동 범위 역시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원을 예로 들었다.
어떤 솜씨 좋은 의원이 고질에 시달리던 환자를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고쳐냈다. 그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비싼 약재들을 아낌없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환자가 이 세상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고, 장차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정말 중요한 일을 수행할 인재 중의 인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병이 나은 환자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만 불한당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그가 누군지 모르는 불한당은 그의 품에 있던 은자를 빼앗기 위하여 죽인 것이다.
은자는 단 한 냥뿐이었기에 불한당은 재수 없다며 그것으로 박주 한 잔을 사 마시며 투덜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금면일호는 이회옥에게 당신이 그 의원이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떤 기분이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불한당이 없었다면 그 서생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후일 백성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지 않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회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직후 이회옥은 제세활빈단이 무엇을 하려는 곳인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악을 멸하려는 단체인 것이다. 그리고 활동 범위가 선무곡을 넘어 전 무림이라는 의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선과 악은 선무곡 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천하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모든 설명이 마쳐진 뒤 금면일호는 이회옥에게 제세활빈단에 입단할 용의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것이 방금 전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겠소? 할 것이오? 말 것이오?"
"하겠소이다."
"오오! 가입을 하시겠소?"
"그렇소이다. 선무곡은 물론 천하를 위해 일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소이다."
이 순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회옥의 뇌리는 섬전처럼 회전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금면일호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언젠가 맡아보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느낌 뿐이었지만 그 냄새는 분명 적대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맡아 본 냄새였다. 오히려 지극히 우호적인 상황에서 맡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본단의 단원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그래도 참고 견딜 수 있겠소?"
"물론이오. 사내 대장부로서 모처럼 큰일을 하려는데 그만한 각오조차 없어서야 되겠소? 어떤 난관이 닥쳐도 꿋꿋하게 견뎌낼 터이니 심려치 마시오."
"으으음! 좋소. 그럼 언제 연공관에 입관하시겠소?"
"소생은 언제라도 좋소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그 일만 해결되면 바로 입관하겠소이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니요? 무엇이지요?"
반문하는 금면일호의 말투를 듣는 순간 이회옥의 뇌리로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는 상념이 있었다. 방금 전의 냄새를 언제 맡았는지를 기억해 낸 것이다.
놀랍게도 금면일호는 화담 홍지함의 손녀이며, 다향루의 루주인 일타홍 홍여진이었다.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는데 그것은 작약(芍藥)의 꽃 향기였다.
꽃이 만개하였을 때 꽃잎을 따서 말린 것을 자그마한 주머니 속에 담은 뒤 지니고 있으면 은은한 꽃향기가 풍긴다.
선무곡 여인들 사이에는 향이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이 같은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말투와 냄새로 미루어 일타홍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만 이회옥은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일부러 신분을 감추려 하는데 굳이 그것을 까발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를 말씀해 보세요. 본단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한번 나서서 해결해 볼게요."
"고맙소이다. 그럼, 염치없지만 한가지 부탁을 드리겠소이다. 소생과 동행하였던 조 낭자의 부친께서 현재 선무분타에 잡혀있소이다.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생사를 알 수 없소이다. 그 어르신을 구해주실 수 있겠소?"
일타홍은 조관걸 부녀와 서로 아는 사이이다. 그렇기에 감추지 않고 털어놓은 것이다.
"으음! 무림천자성 선무분타에 잡혀 계시다고요? 좋아요! 한번 해 보지요. 하지만 성패의 가능성은 반반이에요. 아시다시피 그곳은 이미 용담호혈(龍潭虎穴)로 변해 있을 것이니…"
"좋소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연공관에 입관하겠소이다."
잠시 망설이던 이회옥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선무분타에 생포되어 있는 그를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무림생사부에 기록된 무면호리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누가 나서도 그를 구해내기 쉽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일타홍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화담 홍지함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럼 지금 당장 이분을 따라 연공관으로 가세요. 부디 대성하시길 바래요."
"고맙소이다. 미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소이다."
가볍게 포권을 한 이회옥은 말 없이 돌아서는 사내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 역시 금빛 면구를 쓰고 있기에 용모를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체격으로 미루어 사내라는 것만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누가 만든 통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히 미로(迷路)라 할만한 통로로 향하였다. 정확히 이십 발짝마다 좌우로 갈리는 통로는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리고 막힌 곳도 없었다.
따라서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자칫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그런 곳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안내하던 장한이 멈춘 곳은 지금껏 보아왔던 곳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곳이었다.
좌우로 갈라진 곳에 당도한 장한이 아무 말도 없기에 이회옥은 그가 방향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에구…! 이러니까 뭘 만들 땐 헛갈리지 않게 잘 표시해야지. 지금까지 대체 몇 번이나 방향을 튼 거야? 이백 번인가? 아냐, 조금 전에 일백구십칠 번째로 방향을 틀었으니까 지금은, 으음…! 한 이백 열 번째쯤 되겠군. 그나저나 이걸 누가 만든 거야? 젠장! 아무리 머리 좋은 사람이래도 기억하기 힘들겠다.'
이회옥이 잠시 실소를 머금고 있는 동안에도 장한은 정말 길을 잃었는지 멈춘 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가만 있자. 지금껏 우우좌좌우좌에 우우좌 하고 계속해서 좌좌우우좌우하고 좌좌우 했는데… 가만! 방금 전엔 뭘 했더라?'
사방팔방이 완벽하게 똑같은 통로를 지나오는 동안 이회옥은 일정한 순서가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통로를 지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허억! 까먹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혹시 이 안에서 헤매다 죽는 건 아닐까?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이회옥은 방정맞은 생각이 들자 얼른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지웠다. 정말 길을 잃었다면 엄청나게 헤매지 않고는 이 미로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었다.
우르릉! 우르르르르릉!
나지막한 기관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꽉 막혀있던 벽면의 일부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헉! 세상에 이런…! 절묘하다!'
이회옥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관의 출현에 내심 감탄사를 터뜨렸다. 지금껏 보아왔던 무수히 많은 벽면이나 눈앞에 있던 벽면이나 전혀 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렇기에 이런 곳에 이런 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치 못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몰래 연공관에 잠입하려 한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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