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천사의 빛(Angel Rays)!"

영화 속의 노년(54) - 〈에블린〉

등록 2003.06.20 18:44수정 2003.06.2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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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학교만 마치면, 결혼만 시켜 놓으면…그렇게 부모는 한 해 한 해 나이 들어 머리 희끗한 노년에 이른다. 그렇지만 결혼시켰다고 어디 마음 놓을 수 있을까. 서로 삐걱댈 때마다 가슴 철렁하고, 뒤척이며 밤을 밝힌다.

자식 부부가 이제 아이도 아니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정을 이룬 성인인데 그냥 놔두고 좀 지켜보시라는 조언은 그저 젊은 사람의 매정한 이야기로 들려 서운할 뿐이다. '자식 결혼시켜 내놔봐라. 부모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대답이 날카롭게 되돌아오곤 한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세 아이, 에블린의 엄마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 짐을 싸서 집을 떠난다. 엄마를 부르는 에블린을 한 번 뒤돌아 봤을 뿐,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는다. 세 아이와 남은 남편, 에블린의 아빠 데스몬드 도일. 그 절망의 눈빛. 에블린을 데리고 처가에 가보지만 장모 역시 아내가 간 곳은 모르고 있다.

1953년 당시의 아일랜드 가족법은 부모 어느 한 쪽이 사망하지 않은 이상, 두 사람의 동의가 있어야 양육권을 결정할 수 있었다. 아니면 아이들은 자동으로 보육원으로 보내졌는데, 도일의 두 아들 더못과 모리스, 딸 에블린도 각각 남자아이들이 모여있는 보육원과 여자아이들이 생활하는 보육원으로 따로 떨어져 보내진다.

영화는 아이들을 찾고 싶은 아버지 도일의 안타까움과 고통, 어려움, 이어지는 법적 투쟁과 그 과정을 돕는 이들의 우정 그리고 사랑을 그리고 있다. 모아 놓은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그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하며 술에 젖어 지내는 아버지, 하루 아침에 엄마는 사라지고 아빠와도 떨어져 단체 생활을 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요즘 우리가 많이 접하는 깨어진 가정, 흩어진 가족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에블린에게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처음 보육원으로 가는 날, 아빠는 어린 남동생 둘을 맡았고 에블린은 할아버지가 데려다 주신다. '여기에 있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에블린과 마주 앉은 할아버지. 손녀를 보육원에 두고 와야 하는 할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었을까.

묵묵히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빛을 가리키며, "천사의 빛(Angel Rays)"이라고 알려주시고 수호 천사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빠가 아이들을 찾기 위해 벌이는 재판에서 증언할 때도 에블린에게 햇빛은 바로 수호 천사의 빛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저 하늘 나라에서 지켜보시는 할아버지가 된다.


비록 손자, 손녀 모두 보육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지만 에블린의 할아버지는 아들 도일의 옆을 지킨다. 돈을 벌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아들을 도와, 밤에 술집에서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켜고 아들은 그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너무도 어려운 사정이지만 분홍빛 뺨을 한 할아버지는 부드러우며 잘 웃으신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키운 아버지였던 할아버지가, 이제 며느리가 떠난 자리에 남아 손자, 손녀는 보육원으로 보내고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신다.


어느 날 술집에서 연주를 마친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시고, 이제 세상에는 아버지와 세 아이만 남는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법과의 싸움에서 이겨 아이들을 찾게 된다. 수호 천사 할아버지 덕이었을까.

아이들의 엄마가 아무 말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떠난 그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사랑을 모르는 여자랑 살아온 것을 후회하는 남편의 모습은 부부가 함께 끌어가야 하는 가정의 기본적인 약속과 책임들을 헤아려보게 만든다.

결혼한 자식들의 불화로 속을 끓이시는 나이 드신 부모는, 아무 말 못하고 오늘도 잠 못 이루며 베개를 고쳐 베실 것이다. 반대로 오래 살아온 경험을 앞세워 당신의 주관대로 판단하시며, 그들의 삶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식 부부의 삶은 그들의 것이며 결국은 그들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생각해야 하는 직접 당사자인 부부가 문제 해결을 회피하고, 그 결과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짐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우리 주위에는 너무도 많다.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도일은 아이들을 할아버지나 외할머니에게 맡기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도일의 아버지나 장모 역시 아이들을 길러준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 결혼한 자녀의 불화에 가슴 아프다해도 그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관심과 이해와 지지 정도를 넘어서지 못한다. 결혼시킨 자녀의 가정사에 지나치게 깊이 개입해 그들의 결정에 혼란을 보태는 일은 나이 드신 분의 지혜로움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 여겨진다.

에블린의 아버지 도일이 아이들을 찾기까지 겪는 험한 재판 과정의 시작에는 말없이 옆에 있어주신 아버지가 계셨다. 손녀를 데리고 간 보육원에서도 할아버지는 눈물 흘리거나 장황한 설명으로 아이를 달래지 않으셨다. 그저 마주 앉아 계셨다. 그리고는 조용히 "천사의 빛(Angel Rays)"을 이야기해 주셨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에블린의 가슴에 꼭꼭 새겨진다.

그러고보면 우리들 삶이란 결국 모두 우리들의 선택이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서로 지켜보며 끄덕여주는 것에 힘을 얻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 에블린의 할아버지는 그래서 참으로 따뜻하고 멋있다.

(에블린 Evelyn, 2002 / 감독 브루스 베레스포드 / 출연 피어스 브로스넌, 소피 바바세유, 줄리아나 마길라스, 에이단 퀸, 알랜 베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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