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제, 기자가 가치판단할 게 아니라고?

[취재후기] 신임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 기자간담회에서

등록 2003.06.23 19:16수정 2003.06.2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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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월 13일 오전 11시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무실을 방문했다.

지난 6월 5일 취임한 이만열 신임 국사편찬위원장(숙명여대 사학과 교수)이 주관하는 기자간담회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정식 출입처도 아닌데다, 그것도 학술과 관련된 국가기관의 기자간담회에 주간지 기자, 그것도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은 문외한인 내가 굳이 참석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이 위원장이 취임하기 직전인 6월 2일 발행된 <시민의신문> 창간 10주년 기념호에 단독으로 입수한 국사편찬위 회의록을 공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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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일부 원로 역사학자들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을 비난하고, 그에 대한 국고지원을 반대한다는 충격적 발언이 담겨 있던 이 회의록이 공개되면서 당시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이 일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신임 국편위원장의 솔직한 견해를 들어보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날 '망외의 소득'을 거뒀다. 그것을 제공한 것은 이만열 위원장이 아니었다. 그날 기자간담회에 합석한 기자들이 그 장본인이었다.

한국일보 6월14일자 문화면 머릿기사
한국일보 6월14일자 문화면 머릿기사
나를 포함해 <조선>, <중앙>, <동아>, <한국>, <경향>, <연합> 등 모두 7명의 기자가 참석한 기자간담회 석상과 그후 이어진 점심식사 자리에서 나는 그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다음날 각 신문에 실린 그들의 기사까지 덤으로 읽으면서 친일잔재 청산 문제를 둘러싼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풍경화'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간담회가 시작되자 이만열 국편위원장은 "기존 국편의 업무를 창조적·비판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외부 기관이나 학자들과의 협동작업을 강화하겠다"고 말문을 연 뒤 신임 위원장으로서의 소신과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인 6월 14일자 <경향신문>이 잘 보도한 것처럼 이날의 뜨거운 쟁점은 따로 있었거니와, <경향신문>은 "이날 자리는 국편 운영방침보다는 지난 2일자 <시민의신문>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추진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대한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국편위원 회의록을 공개한 것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는 데 집중됐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문제의 기사를 보도했던 당사자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질문을 이만열 위원장에게 잇따라 던졌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을 비난한 일부 역사학자들의 발언은 그들이 과연 어느 나라의 역사학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한심하고도 동시에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듯한 노골적 발언이 공개된 이상 그들은 이미 국사편찬위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네티즌을 중심으로 '친일인명사전' 지원을 반대하고 비난한 일부 국편위원들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위원장으로서 그들의 사임을 권유할 의향은 없는가? 또 아예 국편에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용의는 없는가?"

경향신문 6월 14일자
경향신문 6월 14일자
이 질문에 대한 이만열 위원장의 답변을 6월 14일자 경향신문과 한국일보는 각각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국편위원들의 의견을 떠나서 국회가 결정한 예산집행은 법적 효력을 가진다. 예산지원을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국편위원들에게 회의록 내용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경향신문)

"사임 종용은 현재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국편은 특수 분야를 연구하는 기관이 아니다. 정히 그런 작업이나 지원이 필요하면 학계가 요구하고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서 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한국일보)

그것은 신임 국편위원장으로서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답변이었다. 이만열 편찬위원장은 이성무, 유영익, 이기동 교수 등 '친일인명사전'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던 편찬위원들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한 견해서까지 제출했던 당사자이긴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그들의 사임을 요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에 분명했다.

실제로 내가 일부 편찬위원의 사임을 권유할 생각이 없냐고 이 위원장에게 질문했던 것도 그에게 당장 그런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회의록이 공개된 이후에도 딴청을 피우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부 편찬위원들의 책임 있는 해명과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사실 이 회의록이 공개된 이후 반향은 민감했다. 우선 당사자인 국사편찬위 측으로부터 회의록 입수 경위를 따져 묻는 전화가 걸려왔으며, 한 국사편찬위원의 아들이 전화를 걸어 보도 내용과 관련해 해명과 반론을 펼치기도 했다. 역사·교육단체 등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문제의 발언을 한 일부 국사편찬위원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표시하는 전화가 쇄도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네티즌이었다. 적극적인 일부 네티즌들은 국사편찬위 인터넷 홈페이지에까지 들어가서 의견을 남겼는데, 국사편찬위에 대한 실망감을 표명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ID를 '이기빈'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한)국사편찬위원회인지 (일본)국사편찬위원회인지 밝혀 달라"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으며, ID '때려잡자 친일파'는 "이 기회에 알량한 지식을 버리고 위원직을 사퇴하라"고 일갈하기도 했다.(네티즌 의견은 상자기사 참조)

앞에서 내가 그런 질문을 던진 것도 결국은 바로 이런 네티즌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조중동 기자 중 한 명이 "국회에서 국고지원을 결의한 방식에 문제는 없었다고 보느냐"는, 회의록에서 한 교수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이 위원장에게 다시 대뜸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는 이 위원장의 답변 뒤 나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질문이 아닌 의견'을 제시했다.

"국고지원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던 일부 국편위원들의 발언에는 일관성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대한 국고지원은 문제삼으면서 정작 '통치자료' 수집에 대한 국고지원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발언을 한 사람이 소속된 대학은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자료를 넘겨받은 상태이다. 너무나 속보이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회의록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일부 역사학자들의 반민족적 멘탈리티라고 할 수 있다. 조중동을 비롯해 대다수 언론이 이 충격적 기사를 받지 않은 것도 의아하다."

나의 공세적 발언에 거부감을 느낀 것일까. 한 기자가 발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일부 국편위원의 문제 발언)은 기자가 가치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짧게 언급한 뒤 일단 넘어갔다. 주먹다짐을 하지 않을 바라면 기자의 품위(?)는 지켜야 했으므로. 아무튼 기자간담회장 분위기는 어색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담회가 끝난 뒤 일행은 야외로 자리를 옮겨 이만열 위원장과 점심식사를 했다.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기자는 선약이 있어서 합석하지 못하고 먼저 떠났다. 이 자리에서도 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그 중에서 인상적인 몇 대목만 소개한다.

우선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출신인 이만열 위원장이 편찬사업 과정에서 느꼈던 소감을 털어놓았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을 바라보는 친일파 후손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사전이 자신들을 해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선입관과 피해의식을 극복해야 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으로 보는 여유 있는 자세가 아쉽다."

그의 발언을 들으면서 나는 '역사' '역사관' '역사의식'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만열 위원장은 과거 단재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물론 그것은 단재 신채호를 기리는 상이다. 신채호가 누구인가? 그는 박은식과 함께 한국 근대역사학의 비조로 불린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된 학술적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부끄럽고 놀랍게도 197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그것도 신용하, 김영호 교수 등 역사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나 경제학자 등에 의해서 먼저 거론됐다.

왜 그랬을까?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일했던 이병도가 해방 이후 서울대 사학과를 접수한 뒤 엘리트 주류 역사학계는 이병도의 후학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됐다.

그렇게 이병도의 실증사학이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단재는 철저히 잊혀진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전임 국편위원장으로서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그 문제의 회의를 주도했던 이성무 교수가 '두계학술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이병도를 기리는 상이다. 두계는 이병도의 호다.

그렇다. 친일문제는 결코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친일파 후손, 즉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선입관과 피해의식을 지적하고 객관적 접근을 주문한 이 위원장의 발언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늙은 학자'보다 못한 '젊은 기자'들의 역사의식을 목도하게 되었다. 친일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친일행각을 지적했는데, 그러자 두 신문사 중 한 신문사 기자가 이렇게 따지듯이 물었던 것이다.

"우리 ○○일보가 친일을 그렇게 많이 했나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거길 들어갔니? 이 한심한 양반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것을 억지로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데 건너편에 있던 또 다른 기자 한 명이 거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의 발언은 이날 기자간담회의 압권(?)이었다.

"아, 그때야 일본천황이 우리나라의 왕이었던 시절인데…."

이 말은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겠느냐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친일파 청산 논쟁 때마다 그 후손들이 가장 많이 주장해온, 예의 '상황론'인 셈이다.

동아일보 6월14일자
동아일보 6월14일자
그러나 조금만 고민해 봐도 그것이 참으로 무책임한 주장임은 금방 알 수 있다. 실제로 일제 말기에 대다수 지도층 인사들이 황국신민화의 길을 걸은 것도 사실이지만, 바로 그 순간에 적지 않은 지도층 인사들이 국내외에서 생명과 재산을 내걸고 독립전쟁을 벌인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이른바 지도층 인사의 '출세형 친일'(적극적 친일)과 일반 백성의 '생계형 친일'(소극적 친일)은 철저하게 구분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찌 그것을 두루뭉실 뒤섞어 초점을 흐리려 하는가. 아니 국내의 친일문제에 대해선 그런 식으로 '상황론에 입각한 원칙 없는 관용'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발언했다.

"친일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라고 본다. 왜 친일행각을 자꾸 부인하려고만 하고, 숨기려고만 하느냐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친일보도를 한 것은 10%밖에 안 된다고 강변하면서도 정작 일제시대 당시의 신문은 영인본으로 만들지 않는다.

굳이 입 아프게 여러 말 할 것 없이 영인본을 만들어서 누구나 쉽게 직접 당시 기사를 읽어보고 친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면 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제시대 당시의 조선일보를 보려면 국회도서관에 가서 마이크로 필름으로 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조선일보가 일제 말기 매년 초마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달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사실조차 최근에야 알려진 것이 아닌가?"


조선일보 6월 14일자
조선일보 6월 14일자
그러자 한 기자가 "조선일보가 일장기 달았던 것이야 이미 다 알려진 사실 아닌가? 그게 뭐 새삼스런 일이라고…"라고 시비를 걸 듯 말했다. 나는 다시 "전문가들이야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일반 국민들은 전혀 몰랐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친일파 문제를 과거지향적이고 촌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 기득권 세력이 문제다"라고 답해 주었다.

적어도 이해 당사자인 신문사야 본능적인 조직보호 차원에서 그렇다 치고 젊은 기자들은 친일잔재 청산 문제에 그래도 전향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일말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다음날 각 신문은 기자간담회 내용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쟁점이 됐던 '친일인명사전' 논란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뿐이었다. 두 신문의 기사 제목은 각각 "친일인명사전 국고지원 수용 필요"(한국일보)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 국고지원 반대 옳지 않다"(경향신문)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기사에서 이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중앙일보>는 아예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도 "기자가 가치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봤던 것일까.

국사편찬위 홈페이지 달군 네티즌 목소리
"들리는가, 독립투사의 통곡 소리가"

국사편찬위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네티즌들의 다양한 의견이 올랐다. 그 중에서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 사회 기득권과 수구세력들이 이 나라를 망쳐왔소.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우리 사회를 부패하게 만들고 있소. 당신들도 수구세력이요? 왜 국민의 뜻이 전달돼 국회에서 넘어온 예산과 사안에 대해 그 따위로 말하는 거요? 당신들의 태도가 일본을 오만하게 만든 거 아니요?

최소한 한 나라의 국사편찬위원 정도라면 국민 수준보다는 높은 역사관이 있어야 할진대 아무리 봐도 당신들이 말한 회의록을 보자면 울화가 치밀어 오르오. 당신들은 자신들의 국가보다 자신의 안위만이 걱정이요? 불똥이 나중에 어떻게 튈까 그것만 골몰하는 거요? 참으로 답답하오.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적 사료로서도 반드시 만들어져야 하고 되려 국가에서 만들어야 하오.

그걸 못해서 이토록 처절한 민주투쟁 과정을 거쳐왔는데 그 역사적 사료조차 거부하겠다? 단지 국가예산이라서? 지하의 독립투사들이 통곡하오. 제발 정신차리시오. 지금 당신들의 회의록이 온 국민의 울분을 사고 있다는 것 각인하시오. 지켜볼 것이오. 당신들의 행태가 국민의 뜻을 얼마나 반영하고 학자적 양심을 반영하는지…." (ID 국민대통령)


한편 편찬위원들에게 조목조목 질문을 던진 네티즌도 있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신 분의 입장에서 친일파 청산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체적으로는 (0) 일제 강점시기가 우리 민족사에서 혹시라도 득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계신가요? (1) 친일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2) 성공 유무나 시기를 떠나, 친일파 청산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3)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4) 해방 이후 미군정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행해진 친일파 청산작업은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5) 한국사를 포함한 역사학계 내부에서는 친일파가 전혀 없었습니까? (6) 역사학계에서 친일파가 있었다면 역사학계 내에서 이에 대한 청산작업은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7) 역사학계에서 친일파임을 또는 이었음을 고백했던 분은 계십니까?

질문이 다소 주관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1)번, (4)번에 대한 답변은 꼭 부탁드립니다. 가능하면 국사편찬위원께서, 그것도 친일파 청산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계신 분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ID 이천수)


/ 정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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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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