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살생부' 우려 있다?

국사편찬위 회의록에 드러난 위원들의 위험한 역사관

등록 2003.06.04 12:11수정 2003.06.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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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소 다로 일본 자민당 정조회장의 '창씨개명 망언'으로 한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는 가운데 국사편찬 주무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들이 민족정기 회복과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추진중인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을 노골적으로 비난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친일반민족사는 우리 역사에서 엄연히 존재했던 역사이나 그동안 이 분야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는 몇몇 개인차원에서 이뤄져 왔다. 학계에서조차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금기시 돼온 것을 두고 사회 일각에서 비난이 제기돼온 점을 감안할 때 대부분 역사학 전공 교수들인 이들의 발언은 후안무치하다는 지적을 받을만 하다고 하겠다.

a 국사편찬위원회 온라인 홈페이지

국사편찬위원회 온라인 홈페이지

지난해 1월 개최된 국사편찬위원회(당시 위원장은 이성무씨) 편찬위원 회의에서 한 편찬위원은 "민간단체의 국고 지원은 문제가 있다"고 발언한데 이어 또다른 한 편찬위원은 "국회가 민간단체에 국고지원을 의결한 것은 문제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 인사는 <친일인명사전>을 두고 "'살생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극언하는가 하면 또다른 한 인사는 "국회가 평소 월권을 잘 하는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민간단체에 국고지원을 의결한 것은 대표적 월권"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예상된다.

특히 한 편찬위원은 동료 편찬위원이 핵심인사로 관여하고 있고, 또 역사학계 원로들이 지도위원 등으로 참여하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두고 "문제가 있는 단체"라고 폄하해 명예훼손 시비가 제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시민의 신문>이 단독입수한 '국사편찬위 회의록'(<2002년 제1차 국사편찬위원회 회의결과 보고>)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이 문건에는 국편 편찬위원들의 회의 일시와 장소, 참석자 명단, 주요 토의내용 등이 차례로 적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일부 직원 이름은 익명 처리).

1. 회의일시: 2002. 1. 30(수) 10:30∼13:30


2. 회의장소: 국사편찬위원회 소회의실

3. 참석위원: 12명(위원장, 편사부장, 이존희, 유영익, 신용철, 신용하, 신형식, 이병휴, 이성미, 박성래, 민현구, 이기동)
*배석: 8명(총무과장, 편사기획실장, 사료조사실장, 연구편찬실장, 자료정보실장, 5급 서○○, 6급 김○○, 7급 김○○)


4. 주요 토의 내용
가. 새 국사교과서 편찬에 대한 국편위원 검토결과 반영
나. 국가기관의 역사자료 관리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
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예산을 지원하는 문제


물론 문제의 발언은 주요 토의내용 중 세 번째 주제인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예산을 지원하는 문제'에서 나왔다. 우리는 그 발언을 확인해 보기 전에 우선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총인원 17명 중 참석자 12명을 그들의 직책까지 덧붙여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전체 명단은 관련기사에 첨부함).

이성무 국편 위원장, 이해준 국편 편사부장, 이존희 서울역사박물관 관장,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 신용철 경희대 교수, 신용하 서울대 교수, 신형식 이화여대 교수, 이병휴 경북대 교수, 이성미 정신문화연 교수, 박성래 한국외대 교수, 민현구 고려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a 2002년 제1차 국사편찬위원회 회의결과 보고서

2002년 제1차 국사편찬위원회 회의결과 보고서

이번에는 12명의 편찬위원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대한 국고지원과 관련해 쏟아낸 비판적 발언을 검토해보자. 그들은 국고지원 문제를 지적한 것은 물론이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 자체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이 크게 4가지로 정리된다.

(1)민간단체에 대한 국고지원은 문제가 있다.
(2)민간단체에 대한 국고지원을 국회가 의결한 것은 문제가 있다.
(3)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는 문제가 있다.
(4)'친일인명사전'(혹은 친일파 청산 작업)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지적과 비난은 어느 정도의 적합성과 타당성을 갖추고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분석하기 전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어떻게 국고지원이 이뤄지게 됐는지 그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덕술 등 친일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50주년이 되는 1999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추진해 왔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최초로 국고가 지원된 것은 2002년. 그보다 1년 전인 2001년 12월 27일 국회를 통과한 정부예산안 중 교육부 배정 예산에 '한일역사연구'라는 항목으로 2억원의 연구지원금이 포함됐다(대다수의 국회의원이 <친일인명사전>이라는 문구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역사연구'라는 항목으로 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2억원이라는 액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애초에 산정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비 총액 35억원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지만 최초로 국가예산이 지원됐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나마 이재정, 김원웅, 이창복 의원 등이 1년 내내 앞장을 서고, 국회 예결위 과반수에 해당하는 26명의 여야 의원이 예산지원 건의안에 서명을 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국회로부터 예산을 배정 받은 교육부는 소속기관 중에서 가장 성격이 맞는 국편을 통해서 이 예산이 민족문제연구소로 전달되도록 결정했다. 국편 편찬위원들이 제일 먼저 문제삼은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1)민간단체에 대한 국고지원은 문제가 있다?

우선 일부 편찬위원들은 "민간단체 국고지원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기관이 민간단체에 국고를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유영익) "국편이 민간단체에 국고를 지원하는 것은 상리(常理)에 맞지 않는다"(이기동) "순수 민간으로 하면 문제가 없다. 다만 국고로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박성래) 등의 발언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는 객관적 근거가 부족할 뿐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 우선 최근 정부의 민간단체 지원은 시대적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절차와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그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거나 억지로 트집을 잡는 것과 같다.

더욱이 편찬위원들은 "기왕 지원할 바에야 좀더 의의 있는 사업에 지원하자"(이기동) "앞으로 통치자료를 정리하겠다는 연구단체가 있으면 그곳에 국고를 지원하자"(유영익)고 발언하기도 했다. 민간단체에 국고를 지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자신들의 애초의 주장을 뒤집는 발언을 한 것이다.

도리어 문제의 심각성은 다른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통치자료를 넘겨받아 가지고 있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의 '통치자료 국고지원' 발언에선 어떤 집단 이기주의 혹은 조직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는 불순함(?)까지 엿보인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란 말인가.

(2)민간단체에 대한 국고지원을 국회가 의결한 것은 문제가 있다?

일부 편찬위원들은 "민간단체 국고지원을 국회가 의결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회의원들의 완전한 월권이다"(이기동) "국편이 좀더 확실하게 안 된다는 의사표시를 했어야만 했다"(신형식) 등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 두 사람이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보면서, 기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휴: "국회의원들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능동적으로 지원했다는 자체가 믿어지질 않는다. 막지 않고 오히려 지원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이성무: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다 그런 입장은 아니다. 사실 이 문제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친일문제에 해당이 안 되는 젊은 국회의원들이다."


a 이성무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3일자로 신임 국편위원장에 국사편찬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인 이만열 숙대교수가 선임됐다.

이성무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3일자로 신임 국편위원장에 국사편찬위원이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인 이만열 숙대교수가 선임됐다. ⓒ 국편 홈페이지

도대체 그들은 어느 나라 역사학자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국고를 지원하는 것이 무슨 범죄행위라도 된단 말인가?

여기서 특히 "친일문제에 해당이 안 되는 젊은 국회의원"이라는 대목은 시사적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족벌신문이나 사학재단 등 대한민국의 주류사회가 사실상 친일파나 그 후손들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 친일파 청산작업에 국고를 지원하는 일에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이름을 빌려주는 것이 전혀 득이 될 게 없다는 속내를 드러낸 셈이 아닌가.

따라서 "국편위원들이 전에 국사교육 강화 건의서를 냈듯이 이번에도 결의를 해서 국회가 예산을 도로 가져가라고 하자"(민현구) "적어도 회의록에 <친일인명사전> 국고지원을 국편위원들이 모두 반대했다는 기록은 남겨둬야 한다"(박성래) 등의 발언은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 아닐까.

(3)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는 문제가 있다?

일부 편찬위원들은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사람들은 능력이나 여러 면에서 검증이 되지 않았다"(이기동)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에는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 김남식 통일문제연구가,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 성대경 성균관대 대학원장, 이만열 숙명여대 교수, 임헌영 문학평론가, 조동걸 국민대 대학원장 등이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중에서 조동걸·이만열 교수는 전·현직 국사편찬위원이기도 하다. 더욱이 신용하 편찬위원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의 지도위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성무 위원장은 회의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은 국편 편찬위원인 이만열 교수"라고 증언했다.

따라서 이성무 위원장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자가당착에 빠진 셈이 됐으며, 이기동 교수의 발언은 공신력을 갖춘 연구기관의 명예를 훼손한 것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4)'친일인명사전'(혹은 친일파 청산 작업)은 문제가 있다?

일부 편찬위원들은 "친일인명사전(혹은 친일파 청산 작업)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을 아예 '살생부'에 비유한 이성무 위원장은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수많은 망언을 쏟아냈다.

"잘못되면 살생부가 될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교육부나 국편이 지원한다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어서 나중에 큰 문제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잘못되면 살생부가 될 텐데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느냐?"
"추후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국고지원 놔두면)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 있다."


이기동 교수도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국편이 큰 문제에 말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아주 민감한 사안이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했으며, 이병휴 교수도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면 당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물론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거론했다. "문제는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데 있다"(이존희) "친일 문제는 절대로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는 사안이다"(이성미) 등의 발언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에 등장하는 '불가능'이나 '절대로'라는 문구야말로 역사학자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공정성'이나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닐까.

그나마 중립적 발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 분위기 때문인지 그 강도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실제로 이병휴 교수는 "사실 친일 문제는 언젠가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아닌가? 각종 사전들이 나와 있으니까 <친일인명사전>도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그도 "다만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가 문제"라고 사족(?)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일부 편찬위원들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월간 <말> 1999년 9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만일 단 하나의 잘못이라도 있다면 그 후손들이 공격할 명분을 얻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사전 자체를 부정하는 핑계거리를 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전을 편찬하는 데는 철저하고 방대한 자료 수집과 정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역사의 정체성을 책임지고 있는 국편 소속 역사학자들이 왜 친일문제에 대해서만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일제 침략으로 단절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설립된 국편이 왜 친일파 청산 작업을 주도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흠집만 내려고 하는 것일까.

독립운동사 연구자는 각 대학의 사학과에 넘쳐나지만 정작 친일문제 연구가는 교수가 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평소 민족주의를 그렇게 외쳤던 신용하 교수가 그날 회의에 참석하고도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되기 직전까지 신문 제호 위에 일장기를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한일합방은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행복을 위해 체결한 조약" "데라우찌 총독은 조선의 대근원을 기초한 위대한 창업공신" "일제의 조선 통치로 '문화 조선' 건설의 결실이 가능"이라고 보도했던 조선일보를 국사교과서에서 '민족지'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민철 연구원은 앞의 글에서 이미 그 이유를 이렇게 진단한 바 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은 제2의 반민특위 활동이다. 그러기에 이 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년 전에도 그랬듯이 이 사업을 방해하는 세력들은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만 해도 한 국립대학 미술학과 교수가 선배 교수들의 친일행위를 거론한 것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방송국의 한 프로듀서가 33인의 민족대표에서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을 추적한 것 때문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이다."

이제 국사편찬위원회 소속 역사학자들의 해명과 답변을 들을 차례다.

(* '회의록'의 개별 발언내용은 별도기사 참고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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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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