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사람의 미술관 기행

평창동 미술관들의 운치를 분양해 드립니다

등록 2003.06.23 14:49수정 2003.06.24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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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서울에 갔다가 차 시간이 어중간하길래 인사동에 들렀다. 늦은 점심을 들기 위해 인사동에서 조계사로 넘어가는 골목인 청석골에 있는 부산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마치고 이곳에서만 28년째 식당을 하고 있는 주인 아저씨와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 식당은 이제는 십년도 더 넘게 아득한 과거로 사라져 버린 민중미술 모임 '그림마당 민' 사람들의 단골집이다.

그림을 통해 시대를 고발하고자 했던 '그림마당 민'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지금은 어디메서 여전히 가슴 속에서 사그라지지 않고 있을 변혁의 불씨를 다독이고 있을까. 주인 아저씨의 얘기를 들으니 1987년 <모내기>라는 작품이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바람에 옥살이를 하셨던 신학철 선생만은 그래도 자주 들리시는 모양이다. 사람 좋은 신학철 선생의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전시 중인 황주리 그림
전시 중인 황주리 그림안병기

관람객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관람객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안병기
다시 인사동 한 길로 들어섰다. 옛 민정당사 앞에 있는 노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황주리 전시회'에 들리기 위해서다. 노화랑 1, 2층은 온통 황주리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황주리는 그의 그림의 소품으로 안경을 즐겨 사용한다. 맨 눈으로 보다 안경을 걸쳐야 더 뚜렸하게 다가오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가 안경을 걸치고 나면 세상은 아주 적나라해진다.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가증스러운 따뜻함을 해체하고 나면 확연히 드러나는 사랑의 쓸쓸함. 그의 그림은 위선 뒤에 있는 따뜻함이 좋은지, 위선이 거세된 차거움이 있는 세계가 더 좋은지 묻는 것 같다.

전시회 주무를 맡고 있는 아가씨에게 작가는 몇 시 쯤에나 이곳에 들리느냐고 물었더니 오후 3시쯤이면 들린다고 한다. 시계를 쳐다보니 시간이 벌써 3시 어름이었다. 문득 호기심이 인다. 어디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황주리의 실체나 한번 파악해 보고 갈까. 그는 어떤 안경을 썼길래 그토록 인간의 위선에 대해서 통달했을까. 나는 이내 고개를 젓는다.

오늘은 오랫만에 평창동 가나아트나 잠깐 들렀다 가기로 한다. 3시 정각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앞에서 평창동 가나아트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승객이라야 모두 6명에 불과하다. 그 중 청일점으로 내가 끼었다.기사님이 조용히 노래 한 곡을 틀어주었다. 곡명은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눈감으면 떠오르는 수많은 당신의 추억/난 잠들지 못하고 당신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리.'

서틀버스 안 풍경
서틀버스 안 풍경안병기
이 노래가 가나아트까지 가는 25분 내내 동행해 주었다. 올해 예순 살 되신 김정웅 기사님은 경북 상주가 고향이시란다. 그 분께 그 지방 토속민요인 <상주 함창 연밥 따는 노래> 얘기를 했더니 막바로 공검지 얘기를 꺼내시며 상주 사람들은 공검지를 공갈못이라고도 안 하고 그냥 공알못이라고 부른다고 덧붙이신다.


버스는 '참여연대'앞으로 해서 재동 고개를 넘어간다. 여기서부터는 사간동이다. 이 고개에는 토속음식이 맛갈스런 집이 많이 있다. 버스는 경복궁 민속박물관 돌담을 끼고 돈다. 곧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티벳박물관이 나오고 왼쪽으로 올라가면 청와대가 나온다.

창밖으로 청와대 춘추관이 보였다. 청와대 앞 분수대 한 켠에서는 새만금 간척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가 열리고 있었지만 분수대 물줄기는 태평스럽기만 하다. 청운중을 지나쳐 세검정 고개에 이르렀다. 오른쪽에 1968년 1.21 사태 때 무장간첩들에게 희생된 최규식 종로서장의 동상이 서 있다.


여기서부터 자하문이다. 옛날 이 고개에는 사과 아닌 우리 고유의 과일인 능금을 함지에 담아 팔던 아낙들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님이 환기미술관에 가실 분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가다 보면 국내 최대의 중국집인 하림각이 나타나고 관람료는 저렴하지만 가끔 볼 만한 공연이 열리는 부암아트홀도 이내 고개를 내민다.

다시 또 하나의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굽어지면 홍제동이요,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터널로 가는 길이다. 버스는 북악터널 쪽으로 간다. 한국일보사를 지나자마자 버스는 왼쪽에 있는 오르막 길을 올라간다. 북한산 자락이다. 누가 이름 붙였는진 모르지만 '사자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그 어느 땐가는 여기에도 사자가 살았던가?

가나아트 풍경
가나아트 풍경안병기
드디어 가나아트에 당도 했다. 1980년대에 가나아트는 인사동에서 조계사 쪽으로 넘어가는 공평동 홍익빌딩 2층에 있었다. 이른바 인사동 6길이 그 길이다. 그러다가 어느 땐지 모르지만 인사동 한 길로 나왔고 5년 전에는 마침내 이 북한산 자락 평창동에 집을 지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가나아트 역사의 전부다. 여기서는 미술 전시 뿐 아니라 가끔 음악회도 열린다. 올 9월에는 장사익의 공연이 예정돼 있기도 하다.

셔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가나아트로 들어가고 나는 혼자 언덕받이를 올라간다. 가나아트를 벗어나면 삼거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김종영미술관이 있고 왼쪽으로 가면 이응로미술관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이응로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세줄 갤러리를 지나쳐 15분 쯤 걸어가니 거기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고암 이응로미술관이 나온다. 미술관 정면 벽에는 고암의 문자 추상을 좋아했던 기호학자이자 구조주의 철학자였던 롤랑 바르트의 글이 쓰여져 있다.

'쓰기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그림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누구든 예술의 길을 가려는 자는 이 물음으로 첫걸음을 떼아야 하리라. 미술관을 둘러본다. 그의 그림들을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보다니! 그러나 오늘 대전으로 내려가야 하는 내겐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응로 미술관
이응로 미술관안병기

미술관 정면 벽에 붙여진 롤랑 바르트의 글귀
미술관 정면 벽에 붙여진 롤랑 바르트의 글귀안병기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이 북한산 자락 평창동은 산동네다. 그러나 산동네 하면 달동네를 떠올리곤 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은 여기오면 산산이 깨지고 만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집들이 즐비하다. 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면서 생각한다. 어디나 마찬가지로 '왜 부자 동네는 적막한 것일까' 하고. 부디 이곳의 미술관들이 지닌 격조있는 문화적 풍취가 그들의 부와 함께 하기를…

토탈미술관의 전경
토탈미술관의 전경안병기
가나아트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김종영미술관으로 향한다. 제일 먼저 가나아트와 맞붙은 토탈 미술관이 나온다. 차 한 잔 마시고 가고 싶은 운치있는 곳이다. 거기서 한 5분 언덕 길을 내려가면 김종영미술관이 나온다. 마침 김종영 자화상 조각을 보았다. 이곳에선 또한 제6회 김종영조각상을 수상한 전항섭의 `전항섭-한 마리의 물고기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씨는 생명의 존엄성과 삶의 유한성을 한 마리의 물고기에 비유해 표현했다.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과 부드러운 질감이 두드러지는 `연가' `만다라' `섬'등의 목조각품들이 인상적이었다.

아쉬움을 그러안고 언덕을 다시 올라와 가나아트에 닿았다. 벌써 버스 출발 시간이 다 되었다. 이곳에선 셔틀버스가 매시 35분에 인사동으로 출발한다. 불과 한 시간 동안의 미술관 여행. 그림 한 점 제대로 감상할 시간조차 되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서 평화가 저녁밥 짓는 연기처럼 뭉개뭉개 피어 오른다.

우리는 입만 열면 서울을 삭막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삭막한 곳이라라 해도 찾아보면 어딘가에 숨 쉴 구멍은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살이의 절묘함이 아닌가.가을이면 이길은 서울에서 가장 운치있는 드라이브 코스가 된다. 그때 다시 난 이 길을 찾을 것이다. 그저 평창동 미술관들의 풍취를 제대로 분양해 드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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