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회억의 언저리에서

추억은 아름다워라

등록 2003.06.25 12:02수정 2003.06.2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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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담을 기어오르는 줄장미 사이로 내다보이는 여름 하늘은 내 어릴적 고향 마을의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온통 푸르름으로 녹색의 성(城)을 이룬 산동네의 여름은 한바탕의 축제였다. 드넓은 고향집 뜨락은 꽃과 나무로 가득했고 환했으며 지금쯤은 뒷산에서 뿜어대는 밤꽃향기로 온 산과 마을이 들썪이리라.


미류나무 꼭대기의 까치울음이 아침을 열고 밤새 친구가 늘어난 나팔꽃과 채송화 식구들이 그 귀여운 모습으로 눈인사를 한다. 노랑 빨강 하양 분홍으로 조화를 이루며 피어난 채송화에 맺힌 아침이슬들이 햇빛에 영롱하고 자작나무를 땐 부엌 아궁이 속에 풋고추를 넣고 끊인 호박된장의 구수한 내음 또한 잊지 못한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일일공부를 하고 유치원을 가고 "바쁘다 바빠" 하면서 미술학원으로 피아노학원으로 동당걸음 칠 나이에 나는 "앉으면 살고 일어나면 죽는다"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잠자리를 못살게 굴었다.

시냇가에서 송사리를 몰고 도랑에서 가재를 잡다가 배가 고프면 산딸기를 따먹고 계곡 언덕배기에 눈처럼 하얗게 핀 찔레꽃의 찔레순을 꺾다가 피를 흘리기 일쑤였지만 그 일을 일과처럼 반복했으니.

모깃불을 지펴놓은 산골의 여름밤은 또 얼마나 푸근하고 넉넉한가.
지붕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박꽃 너머로 반딧불이 날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는 찐옥수수와 군감자의 맛을 냉청량 음료와 얼음과자로 길들여진 도회지의 꼬마들이 어찌 알랴. 멍석 위 놋양푼엔 밀개떡과 호박전이, 그리고 닷새마다 서는 장날엔 개구리 참외와 담겨지곤 했었지.

마을 앞 무논에선 개구리의 함창이 요란하고, 뒷산에선 소쩍새가 숲의 한적함을 깨뜨리며 피묻은 울음을 토해내고,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온 까까머리 중학생인 오빠가 서투르게 부르는 컴 백 투 미, 디영 원스, 쌔드무비와 함께 산골의 여름밤은 무르익는다.


암청색 밤하늘에 수없이 박혀있는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던가. 모깃불이 사위어갈 무렵 손톱에 꽃물 들이고 별을 헤다가 잠들면 누군가에 의해 안방으로 옮겨지곤 하던 여름밤의 풋풋하고 감미로운 추억들.

이제는 숱한 연륜이 쌓이고 실로 수 많은 세월이 이끼처럼 쌓였다.
감꽃을 주워모아 목걸이를 만들고 시계풀로 풀꽃반지 만들어 끼던 그 주먹만한 꼬마가 이렇듯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한차례 근대화의 물결이 휩쓸고는 갔지만 고향 마을은 아직도 색채를 잃지 않았고 어리숙해 뵈도록 순하디 순한 내 이웃들의 눈빛도 퇴색하질 않았다. 지금도 반백이 기운 눈물같은 내 어머님이 계신 백마강변 기슭 산골마을엔 대추가 하얗게 영글어가고 밤이면 달맞이꽃이 유령처럼 피어나리라.

내 유년시절의 기억처럼, 기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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