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 키우는 재미 쏠쏠해요"

[육아일기] 발가벗고 출근길을 따라 나서다

등록 2003.06.27 09:27수정 2003.06.2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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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인 우리 부부는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바쁘면서도 살얼음을 걷는 긴장감을 느낍니다. 20개월짜리 늦둥이 주혜의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간 출근시간이 늦어질 수 있어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배수원
아침마다 어머니와 장모님께서 주혜를 돌보러 오실 때 가끔 할머니를 외면할 때가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주혜가 서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신경이 쓰입니다. 가끔 어머니와 산책을 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시간 감각이 있을 리 없는 주혜가 산책 나갈 시간으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혼자서 아무 기척도 없이 조용히 밖을 나서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앞서지만 웃음부터 나옵니다.

주혜는 최근 들어 산책을 나가면 빨간 자동차 모양의 가방을 들고 나가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제 언니도 학교갈 때 그렇고 우리 부부가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라 이젠 모방이 단단히 된 모양입니다. 오늘은 그 빨간 가방을 들고는 초록색 고무신을 신고 있어 서로 대조되는 색인지라 약간 촌티가 나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일입니까? 웃옷은 대강 걸친 것 같은 데 아랫도리는 걸치지도 않은 채로 문을 나서겠다고 '우와'하며 밖을 나가자는 의사표시를 하는 겁니다. 아침 출근 시간에 온 가족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배를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번 눈을 감고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랫도리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벗은 몸, 위에는 반 팔 내의, 목에는 장난감 휴대폰을 걸고, 신발은 초록색 고무신, 손에 든 가방은 빨간 자동차 모양의 가방'을 한 여자아이를.

이렇듯 제 딴에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서고 있습니다. 저녁시간에는 거의 매일 같이 산책을 하니 그렇다치고 아침 시간에 이렇게까지 선수를 친 적이 없기에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아침 저녁으로 주혜가 주는 행복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입니다.


이 놈은 여러 모로 연구대상입니다. 어찌나 당찬지 20개월 주제에 10살짜리 제 언니에게도 도전할 정도입니다. 제 언니도 경쟁심이 강한 편인데 그놈이 언니에게 대드는 것을 보면 둘 다 어금버금합니다. 일 례로 이놈은 컴퓨터를 놓고도 제 언니와 경쟁을 합니다. 제 언니가 컴퓨터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시늉이라도 할라치면 "꼽떠(컴퓨터)"라고 외치며 제 빠르게 달려가 의자를 차지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제 언니가 가까이 오면 "가"하며 멀리 물리칩니다. 그러고는 "옷 입어"라 요구합니다. '옷 입어'라는 명령은 어린이 사이트의 '옷 입히기 게임'을 하자는 뜻이지요. 옷 입히기 게임을 하면 주변에서 시중을 들어야 하니 이것도 여간 힘든 노동이 아닙니다. 한 시간도 그냥 훌쩍 넘어갑니다. 막무가냅니다. 젖을 빨아가면서 놀이를 즐깁니다. 색다른 놀이가 없거나 다른 관심사가 없는 한 이것에 열중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20개월짜리가 벌써 컴퓨터 놀이에 익숙하니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 고집을 꺾을라치면 몇 십 분간 울음보를 터뜨리며 고집을 부리니 도대체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컴퓨터 옷 입히기를 하자고 해 한 시간 정도를 같이 놀아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계속 고집을 부리는 통에 이를 보다 못한 아내가 잠을 자자며 구슬려도 전혀 반응이 없자, 반강제로 안아 큰방에 뉘이고 궁둥이를 찰싹 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방성대곡하더니 그 자리에서 오줌을 죽 갈기더라고요. 그리고는 "아빠"를 부르더니 내 품에 안겨서 30분 정도 큰 울음을 그치지 않더군요. 엄마가 자신을 가혹하게 대한 것에 대해 분함을 참지 못한다는 뜻인 것 같았습니다. 심한 반감을 느낀 것입니다.

좀 진정될 쯤에 "엄마 가서 젖 먹고 자자"고 영아(嬰兒)식 언어로 설득했지만 "안 해"하며 완강히 거절을 하더군요. 엄마에 대해 배신감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요? 유모차에 잠을 재우면서 안됐다는 생각에서 약간은 우울해집디다. 결국 그 날은 주혜가 아빠의 품에서 잠이 든 유일무이한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렇듯 늦둥이 주혜가 우리 가족의 일상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방향키가 되어 있습니다. 40대 중반 나이에 남들은 고등학생 자녀가 있어 대학입시 걱정을 한다는데, 초등학교 3년 생과 20개월짜리 늦둥이를 자식으로 두고 있어 젊게 사는 것 같아 좋습니다.

한창 바쁘고 정신이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어 주혜가 태어난 2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마음 놓고 멀리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었습니다만 이 놈을 곁에 두고 있으면 하루에도 몇 번은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으니 이것 말고 더 큰 복이 무엇일까 싶습니다. 주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나는 이 놈이 태어날 때 이 놈을 일컬어 '하늘에서 보내준 귀한 선물'이라 여겼습니다. 큰애가 태어난 지 7년이 지난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 가족들에게 행복한 웃음을 매일 한아름씩 안겨주니 말입니다.

퇴근길에는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집 부근 어디선가 빨간색 자동차 가방을 들고 할머니와 산책하는 주혜를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조막만한 놈이 빨간색 빈 가방을 들고는 뒤뚱뒤뚱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걷는 주혜를 볼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결혼 후 주신 첫 아들을 인큐베이트에서 빼앗아 갔었습니다. 그때 나는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느냐"고 신을 원망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혜를 선물로 보내면서 우리들의 슬픔을 행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첫아들을 잃고 느꼈던 아픔의 깊이를 채우고도 몇 갑절이나 남도록 행복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매일 행복한 나날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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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간지 기고가이며 교육비평가입니다. 교육과 사회부문에서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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